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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해석가 Mar 27. 2023

괴물의 사회, 사회 속 어린 괴물과의 연대

<도희야> 해석

 도희와 영남의 특수한 관계를 넘어서 연대까지 다룬 영화 <도희야>는 우리 사회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영화는 여수 주변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오늘날 시골의 특징을 모두 담은 이 마을은 노인층의 비율이 젊은 층보다 월등히 높고, 법과 규칙이 묵인되는 폐쇄적인 곳이다. 영화는 서울 경찰청에서 징계를 받은 영남이 이 마을로 발령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운전하고 있는 영남 옆으로는 할머니가 막걸리를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영남의 옆자리에 탄 경찰은 그런 할머니에게 경고조치만 할 뿐 적극적인 처벌은 하지 않는다.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하기는커녕 범죄를 묵인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런 곳에서 약자의 인권은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감독은 이런 사회에서 서로 다른 처지의 소수자를 등장시키고, 그중에서도 도희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해 나간다.


 영화는 많은 상징을 사용한다. 먼저 우유의 상징에 대해서 알아보자. 영화에서 우유는 총 3번 등장한다. 도희가 가정 폭력을 피해 영남의 집에 처음 간 순간 영남이 도희에게 우유 한 잔을 준다. 이때, 도희는 우유를 마실 듯하지만 마시지 않는다. 설령 마셨다고 하더라도 아주 조금 마신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우유 등장 장면은 배가 고프다며 영남을 깨운 도희가 소주를 물로 착각하고 마시는 장면이다. 그 순간 영남은 도희에게 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마지막은 도희가 진술실에 들어가 용호에게 성폭행당했다며 거짓 진술하는 장면이다. 도희가 반투과성 거울(취조실에 있는 거울, 한쪽 면은 유리이지만 반대쪽 면은 거울인 것) 너머에 있는 영남을 바라보고 난 후 우유를 다 마셔버린다. 우유의 의미는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변화되는 양상을 취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면에서 등장한 우유, 즉 영남이 따라주는 우유는 도희를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영남의 시선이 담겨있다. 우유의 하얀 속성이 순수함을 상징한다. 이를 알 수 있는 근거는 도희가 “테레비(TV)를 보고 잘 따라해요” 라는 말과 그 이후의 행동을 통해서이다. 아무런 거름망 없이 욕설까지도 TV 속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도희의 모습은 그녀의 순수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의 우유의 의미는 달라진다. 우유는 물과는 다르게 혼탁하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으면 속이 다 보이는 물과는 달리 우유는 속이 보이지 않는다. 유리잔에 담긴 혼탁한 우유를 자기 몸속으로 마셔버리는 것은 “보통 애들이랑은 많이 다른 것 같고, 속을 잘 모르겠고, 애 같지도 않고, 꼭 어린 괴물 같은” 도희의 모습을 상징한다.


 소주는 물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영화에서 이런 소주의 특성을 이용한 부분이 눈에 띈다. 영남이 함께 살게 된 도희에게 밥을 해주는 장면에서 도희는 소주를 물로 착각하여 마신다. 이때, 도희는 놀라서 소주를 모두 뱉는다.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목욕 장면에서 도희는 마치 소주를 마셔본 적이 있는 것처럼 벌컥벌컥 마신다. 소주를 대하는 도희의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 것인데, 도희의 어린 괴물로서의 속성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소주가 가지는 의미는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바로 편견이다. 영남이 처음 마을로 오던 날, 수십 개의 생수병을 사서 오는데, 여기에는 물이 아닌 소주가 담겨있다. 소주가 담긴 페트병에 생수 업체의 라벨이 둘러져 있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장면은 우리가 가지는 편견과 일맥상통한다. 영남이 성 소수자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녀가 입건되었을 때 조사를 담당하는 경찰은 ‘성소수자 + 입건 = 성폭행범’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다. 이는 영남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단순히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닌 다수의 생각, 사회의 생각으로 확장된다. 즉, 물로 둔갑한 소주는 도희의 이중성, 그리고 약자에게 씌워지는 사회의 라벨(편견) 모두를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희의 집은 1층인데 반하여 영남의 집은 2층이다. 이런 설정은 영남의 집이 이상향처럼 느껴지도록 배치한 것이다. 반드시 계단을 올라가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영남의 집은 큰 권력과 계급을 가진 영남이 도희에게 주는 사랑과 보호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희는 항상 영남의 집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이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과 천국을 모두 끌어온 예로 볼 수 있다. 다만, <신곡>에서는 지옥이 지하에 있는 반면, <도희야>에서는 지상을 지옥으로 묘사하였다. 도희가 살고 있는 집은 아주 어둡다. 집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밝은 대낮임에도 실내로 들어오는 빛은 거의 없어서 매우 깜깜하다. 게다가 그 안에 있는 도희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채 앉아있는 절망과 슬픔의 장소이자 폭력과 범죄의 장소이다. 반면, 영남의 집에는 빛이 아주 많이 들어온다. 밤에도 조명으로 밝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영남이 혼자 있을 때는 어둡게 있지만, 도희와 함께 있을 때는 조명을 하나라도 켜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도희가 어둠 속에서 나와서 빛으로 나아가기를 바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폭력과 범죄가 이루어지는 지상은 지옥으로, 보살핌과 사랑이 있는 영남의 집은 천국으로 대비하여 도희가 영남의 집에서 느끼는 안정감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중심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사람들의 연대가 느껴지는 영화’라는 김중혁 작가의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성적 소수자인 영남과 가정 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도희, 그리고 노동 착취의 피해자이자 불법체류자인 인도인 하킴까지. 영화는 영남이 아동 성폭행죄로 구치되었을 때 철창 안에서 하킴을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주제가 확장된다. 즉, 용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 세 가지 이야기를 적절하게 잘 접목하여서 소수자의 연대에 대한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거기에 현실 사회의 모습까지 담고 있다.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은 약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됨을 이성적으로는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상황이 되면 나도 모르게 편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런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시한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수미상관의 관계이다. 첫 장면은 영남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은 이후 트렁크에서 전방을 향해 카메라를 잡는 구도였다면, 마지막 장면은 트렁크에서 전방을 향한 장면을 먼저 담고, 이후 잠든 도희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다른 점이라면 첫 장면에서는 비가 오다가 그친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린다는 점이다. 첫 장면에서 달려오던 영남의 차가 실수로 물 웅덩이를 빠르게 통과하여 도희에게 물을 뿌린다. 이때, 물속에 있는 사람은 도희뿐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둘이 함께 비 속에 있다. 사회적 질타와 무시, 편견 혹은 폭력으로 상징되는 ‘비’ 속에 있는 그들이 위험천만해 보이는 굽은 산길을 지나 멀어져 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도희가 ‘어린 괴물’이 된 이유는 괴물이 되지 않고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괴물’이라는 말에는 자신과는, 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속성과는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성 소수자인 영남 또한 영화 속 사회에서는 괴물로 불렸다. 이런 괴물들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사회가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정상인 괴물’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를 돌아볼 시간이다. <도희야>는 단순히 영화 속 시골 마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나아가는 길, 그리고 멀어지는 모습을 통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더 나은 미래를 촉구하는,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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