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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린 Apr 06. 2022

찡그려서라도 웃으라고

나한 얼굴(유물번호:부여-000285)


 그가 늙은이의 눈에 띈 것은 교실 맨 앞줄에 있어서가 아녔다. 교실에 비치된 붙어잇는 책걸상에서 알맞은 자세를 취하려 낑낑대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편하게 안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가 중학교 내내 그런 책걸상을 썼다고 웃자 늙은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입학 기념 졸업생 특별 강의 때, 학생들은 늙은이가 교탁에 섰을 때 한 번 절망했고, 늙은이가 칠판에 '외교관'을 한자로 쓸 때 두 번 절망했다. 늙은이는 아랑곳없이 준비해 온 말을 시작했다.

"한자로 풀어 쓰면 바깥을 오고가는 관직입니다. 이 바깥을 오고 간다는게 참 묘한거죠. 지금이야 국외를 오가는게 아무렇지도 않지만, 먼 옛날에는 얼마나 낯선 일이었겠어요?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겠어요? 안은 편안한 곳이에요. 여러분들도 지금 집에 가고 싶을테지요. 중학교 때 친구들이 보고싶기도 하겠지요. 내가 알고 있다는걸 찾는건 관성이에요. 외교란건 관성을 뿌리치는 일이에요. 낯선 곳을 가서 낯선 문화의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늙은이가 여기쯤 말을 했을 때 학생들의 반은 자고 있었고 반은 이어폰을 끼고 선행학습을 하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꼼짝않고 늙은이의 말을 들었다. 맨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사실 교탁에서 제일 안보인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탓이었다. 늙은이도 이젠 뒷자리에 서있는 담임보다는 그를 보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담임은 폰을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게 편해진 지금도 외교는 도전이에요. 어쩌면 전보다 더 도전적일지도 몰라요. 세상은 서로가 더 중요해지고 서로에게 더 파괴적으로 대하게 됐으니까요."

와아아. 옆반에서 마술쇼라도 한 것 마냥 웃음소리가 나왔다. 벽 너머 젊은 졸업생의 목소리도 더 힘차진게 느껴졌다. 몇명이 중얼거렸다. 저기는 벌써 끝내고 자습하려나 보네.

"이 할애비 나이가 많아보이죠? 맞아요. 저는 몇십년 전에 외교관 생활을 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설령 여기에 외교관이 꿈인 친구가 있어도 도와줄 수 있는게 없어요. 대신, 내가 나이고 많고, 남들이 하지 않은 대화를 해서 얻은게 있어요. 뭘까요?"

일동 침묵. 그는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미소예요. 이 지구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을 가도 은은한 미소는 변하지 않는 선의의 표시에요. 여러분들이 낯선 환경에 몰려 무서울 때, 누군가 무서워 떨고 있을 때 미소를 건네보세요. 그동안 쌓여온 미소의 가치가 여러분을 도와줄지 몰라요."

그리곤 늙은이는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 쭈글쭈한 미소는 은은한 미소라기보단 무서워 떨다가 짓는 미소에 가까운 묘함이었다.

"그럼, 모두들 얌전히 들어줘서 고마워요. 오랜만에 젊은 기운을 느끼니 좋네요. 하는 일 잘되고 열심히 살아요."

학생들은 약간의 죄책감이 얹어졌다. 얌전히 들은 학생이라곤 그 하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라고 죄책감을 안가진건 아녔다.

늙은이는 정중히 인사하고 교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새 산만해진 나머지 학생들 몰래 작은 비닐 포장지에 싸여진 선물을 그에게 쥐어줬다. 홍삼캔디나 종합제리, 이런건가? 하고 펼쳐봤더니, 더 이상한 맛들이 펼쳐져 있었다. 듣도보도 못한 신제품들. 뭐랑 뭐랑 콜라보한 젤리, 매운맛 사탕. 그는 하나하나 꺼내보다가 쪽지가 나오자 교문 밖을 나서는 늙은이를 붙잡았다.


그들은 그 후로 딱 한 번 만났고, 멀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늙은이의 미소는 보다 편안해졌고, 그는 보다 호감을 많이 사게 되었다. 그는 늙은이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내년엔 강의 같은거 하시지 말라고, 요즘 고등학생들은 늙은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술궂다고. 늙은이는 바람 빠진 소리로 쉼없이 웃으며 말했다.

"학생, 우리 때라고 다른건 없었어요. 늙은 사람 말을 귀담아 듣는 젊은이가 몇이나 되겠어요. 다만, 나도 세상을 살아보니까 신기한거지. 아, 정말 어른들이 말하는대로 되는구나. 이 땐 이렇게 착실하게 늙고 이 땐 욕심을 버려야 하는구나. 나도 신기해서 말할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미소, 그까짓 미소가 살면서 그렇게 도움이 됐다고요. 그 도움이 된 도구로 나는 낯선세계와 또 외교를 하는 건거예요. 내 도구 좀 보시겠어요, 하고"

그는 아리송했다. 날 받아주지 않는 세계 앞에서 만족하는 늙은이의 모습은 늙은이가 교실에서 보여준 미소 만큼이나 처량해 보였으므로. 늙은이는 그의 머리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팽팽 휘리릭.


그가 늙은이를 떠올렸을 때 그는 반쯤 부패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는 젊고 멀쩡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늙고 부패하고 있다 여겼다. 그건 고3 때 일이었다. 고3. 그가 살아온 과거의 총 집합체인 시점에서 그는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몇달 째 침대에서 뭉개지고 있었다. 그러다 늙은이가 떠올랐다. 늙은이랑 만날 때 카페에 갔고 그 때 꽤 괜찮은 얘길 했던거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났다. 신기하다라는 단어 외에는. 그는 새삼 그 단어를 반복했다. 신기하다라. 나이 먹는게 신기하다고? 난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건 나이를 어느정도 먹어야 되는거지? 파릇. 부패하고 있다는 편견에서 호기심이 싹텄다. 그는 침대에서 미소를 지어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분이 단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싹 텄다는 사실도 그게 중요한 변화란 사실도 모르는 그였다. 하지만 그 파릇, 함이 또 파릇, 하고 다른 호기심을 싹틔웠다. 내가 밖으로 나가서 미소를 지어야 효과가 있는건가? 그의 머리가 살아나고 있었다. 늙은이의 단어가 더 많이 기억이 났다. 안, 편안함, 관성, 뿌리치다, 도전... 침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의 머리는 이제 늙은이를 잊었을 때처럼 팽팽 휘리릭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곧 그는 침대 밖을 나갈 것이다. 미소를 무기로, 아니 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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