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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BAC Aug 26. 2021

안락사에 관하여

죽음에 관해 생각해 본 적 있지요?

<안락사에 관하여>


우리집 수족관에는, 60~70마리의 어미새끼 구피들이 바글바글 산다. 얼마 전 30마리 정도를 강남으로 입양시켜서 그나마 그 정도가 된 것이다. 수컷들은 밥을 줘도 밥보다 암컷들 앞에서 춤을 추며 구애활동이 먼저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좁은 수족관에 새끼 구피들이 자꾸 늘어날 수밖에.


때로는 짓궂은 주인이 구애활동을 하는 수컷에게 ‘야, 이 녀석들아. 밥 먹어, 밥!’ 하며 암컷들로부터 쫒아주기도 하지만, 사실 암컷 구피들과 대화한 적은 없다. 암컷들의 속마음은 짐작만 할 뿐 정확히는 알지 못하며, 어쩌면 암컷 구피들의 도망가는 듯한 행위 자체도 그들만의 연애방법일지도 모른다. 다가가는 듯하다가 수컷이 다가오면 다시 도망가고 또 도망가다가도 멈칫 다시 멈추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치 영화 속에서 남녀주인공이 ‘나 잡아봐라’ 하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런 모습과도 같다.


사실은 지난겨울이 지나면 모두 방생할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좁은 수족관이 어쩌면 답답할지도 모른다는 오로지 나만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고민이었다. 그런데, 주변사람들의 의견이나 녀석들의 행위로 봐서는 도무지 내가 주는 밥 외에는 자연 속에서 찾아먹으며 살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다 주인아줌마가 바빠서 밥을 못 주는 날은 아주 조금만 버티면 전날 못 먹었던 몫까지 왕창 넣어주니 그것 외에는 사실 고생을 모르고 자라긴 했다. 주인아줌마가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벌어오라고 구박하는 일도 없지 않나. 심지어는 자기들이 어지럽혀 놓은 방도 주인아줌마가 하녀처럼 깨끗이 청소하고 반질반질 닦아주니 얼마나 편할까. 물론 이것은 순전히 그들과 인연이 된 주인아줌마의 입장과 생각일 뿐이다.


구피 녀석들은 그래도 나름 행복해 보인다. 그래도 친구도 많고 가족도 억수로 많다. 아니 어쩌면, 녀석들의 어머니아버지 그리고 녀석들의 할아버지할머니까지 모두 내가 키웠기 때문에, 녀석들은 모두 근친관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두 정상이다. 아마도 신이 녀석들에게는 근친상간을 허락한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는 신은 좀 불공평하다고 해야 하나 공평하다고 해야하나?


구피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집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약 1년 정도 키우는 달팽이다. 얼마 전 별자리 운세를 보니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우리집의 우환은 아마도 이 녀석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대문 앞에서 우중산책을 하던 녀석을 발견하여 데리고 왔는데, 그 후로 샐러드도 주고 야채를 주었더니 너무 귀엽게 잘 먹기에 달팽이가 행복한 줄 알았다. 아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달팽이에게 인사했고, 녀석의 먹이를 뭘 줘야하는지 검색도 하며 애정을 쏟아부었다. 급기야 아들은 먼저 달팽이를 키운 엄마의 지인 화가선생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는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때맞춰 화가선생님 집의 달팽이는 수명이 다 되어 죽게 되었고, 선생님은 먹이던 먹이를 라파엘에게 주었다. 달팽이는 계란껍질의 칼슘분을 먹어야 달팽이집이 튼튼해지기 때문에 두 종류의 먹이를 섞어서 주어야 한다. 녀석은 처음부터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잘 먹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샐러드와 야채는 전혀 먹지 않고 그냥 꿀꺽꿀꺽 삼키기만 하면 되는 쉬운 먹이만을 먹었다. ‘그래. 입맛이 없을 거야, 녀석도.’ 하며 녀석의 입맛이 돌아올 때까지 잔소리 않고 녀석이 좋아하는 것만을 먹도록 그냥 두었다. 그런데 그 무렵 주인아줌마의 실수였을까? 잠시 달팽이죽을 주지 말고 야채만 넣어줬어야 했던 건지, 녀석은 그 이후로 점점 야채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끔 자기 집 밖으로 나와 집안을 조금 산책하기도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집 뚜껑을 열어두어도 자기 집 안에서 꼼짝도 않는 게으름뱅이가 되었다.

 

녀석이 하루종일 단 요만큼의 운동도 않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가만히 있은 지 며칠이 되었다. 어제는 오전에 나가며 혹시나 싶어서 상추가 심어져있는 화단에 녀석을 살며시 옮겨주었다. ‘그래, 혹시나 네가 움직이게 되면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렴.’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저녁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와 녀석에게 가보니 역시 꼼짝도 않고 움직이지 않은 채 화단의 상추밭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더듬이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말이다.


분명 아무것도 먹지 않은 흔적을 발견하고 서둘러 먹이를 준비해주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먹이도 먹지 않는다. 녀석은 아마도 이대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녀석은 어쩌면 그냥 이대로 죽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친구도 없고, 재미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고, 매일 먹는 달팽이죽이 맛이 있을 리도 없을 테니 그럴지도 모른다.


가끔 녀석은 나에게 그냥 자기를 안락사시켜 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조그마한 집에 갇혀서 갈 곳도 없는 녀석이 하루하루 슬프게 살아가며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제발 나를 안락사시켜 줘.’라고 말이다. 오늘 서울은 태양도 뜨겁지 않아서 도무지 나는 달팽이를 죽여줄 수가 없다. 잠시 소나기가 내려 흐린 하늘이 어쩌면 축축한 환경을 사랑하는 달팽이에게는 최고의 오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살인동기가 ‘햇빛이 눈부셔서’라고 무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쩌면 그냥 순간적인 찬란한 감정에 의한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은 태양이 이유가 되었던 건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광경을 보며 자신을 향한 칼날로 착각하여 방어하기 위해 총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정말로 아랍인이 꺼내는 칼의 강렬한 빛에 자극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총을 쏘았을 수도 있다. 진실은 무엇일까. 변호인이 주장하려 한 것처럼 방어를 위해서였을까, 뫼르소의 말처럼 그냥 눈부셔서였을까, 아니면 판사의 선고처럼 무자비한 살인이었을까. 뫼르소는 왜 억울한 사형선고를 받고도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고 했을까. 당신의 생각은? 달팽이가 뫼르소라면?


나는 우리집 달팽이가 아주 조금씩 늙어가며 자기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으며 고통도 없이 어느 날 조용히 사그라져 가기를 바란다. 고종명(考終命)은 인간의 오복 중 하나라고 한다. 고통도 슬픔도 없고 후회도 원망도 없는 편안한 죽음이 그것이다. 우리집 달팽이가 복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달팽이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도록 해주어야겠으나 이미 달팽이는 힘이 없다.


별 하나가 내려와 사람이 되었다가 죽을 때 다시 별이 되어 올라간다. 모체의 자궁 속에서 단세포생물부터 어류, 양서류, 파충류 단계를 거쳐 인간 단계까지의 진화과정을 모두 거치는 동안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자궁을 나와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너무 무거워졌구나.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알던 것도 내려놓고 생각하던 것도 내려놓고, 점점 더 가벼워져야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겠구나. 애당초 가벼웠을 달팽이 녀석은 죽음이 편안할 거야. 우리집 달팽이의 삶이 만족스러웠을지 궁금한 것도 결국은 내가 인간으로서 가진 무게 때문일까? 그나저나 나는, 그리고 당신은, 우리는...? 얼마나 가벼워져야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은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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