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BAC Jan 12. 2022

할머니의 그릇들

그릇이야기

이사 후 초긴장 속에 지내왔다. 매일매일 일들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그저 ‘내일은 뭘 해야겠다’는 숙제를 머릿속에 담고 절대로 그 숙제를 미루면 안 된다는 묵시적인 약속처럼 몸도 마음도 버텨왔던 것 같다. 지난 몇 달 동안, 웬일인지 잔병치레가 많은 내가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이제야 좀 긴장이 풀렸는지 지난 며칠간 급체로 된통 아팠다. 평소보다 많이 먹거나 급히 먹지도 않았는데 심하게 체기가 있어 아무것도 넘길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쌍꺼풀이 세 겹의 ‘삼꺼풀’로 져서, 그런 이상한 내 눈을 보며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는 다행히 조금 정신을 차리고, 친정집에 가서 엄마가 만들어준 미음처럼 맑은 죽을 먹었다.


엄마한테 맡겨두었던, 새로 지은 내 집 자리의 옛집에 살던 할머니로부터 받은 그릇 몇 점도 찾아와서 오늘 박박 닦았다. 어릴 적 엄마를 심하게 구박하고 못살게 굴던 친할머니로 인해 이 세상의 모든 노인들은 아주 고약하고 나쁜 마귀할멈과 같을 거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탓인지 노인들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도 만지기를 좋아하지 않던 나였다.


옛집의 할머니는 부군이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혼자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재혼하셨는데, 할아버지는 첫부인과 사이에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고, 재혼한 두 분 사이에는 따님을 한 명 두었나 보았다. 어떤 사연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할머니의 친척이 마침 일본에 있었고, 할머니는 일찌감치 따님을 일본으로 시집보내셨다.


혼자이신 할머니가 왠지 측은해서, 가끔씩 공사현장에 올 때면 할머니가 좋아하신다던 빵을 조금씩 사다드렸다. 할머니는 항상 배를 움켜쥐고 계셨다. 수술을 잘못하여 모든 장기를 한쪽으로 몰아넣고 꿰맸으며, 그래서 항상 배변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연을 듣고 화가 났다. 자식들은 뭐 하냐, 당장 의료사고로 고소하라고 말씀드렸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딸도 여기에 안 살아’ 하시며 고개를 떨구셨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에 할머니는 따님이 일본으로 시집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그 이야기를 하시던 할머니의 쓸쓸한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할머니에게 얻은 그릇들을 닦다보니 모두 일본그릇들이다. 특히나 찻잔, 술잔 등 평소에 자주 사용하지 않는 그릇들이어서 일본에 있는 딸을 보러 오가며 모아온 그릇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 사람의 애(哀)와 환(歡)이 고스란히 담긴 인생을 함께해온 그 그릇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추억과 사연들이 담겨있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하루는 맨날 얻어먹으니 미안하다며 커피를 한 잔 타주겠다고 하셨다. 평소 같으면 불편한 몸의 할머니에게 커피를 타게 할 수는 없었지만, 할머니의 마음이 그래서 편하게 된다면 되레 커피를 대접받는 게 더 할머니를 위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오른손가락도 세 개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설거지 상태는 안 봐도 뻔했다.


정말로 오래된 장 속에서 꺼내 오신 커피잔 바닥에는 뭔가 지워지지 않는 듯한 찌든 때가 있었고 잔 주변도 깨끗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대접하겠다고 예쁜 잔을 꺼내 들고 나오신 그 마음이 뭔지 분명 느낄 수 있었기에 ‘그깟 찌든 때쯤이야’라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커피를 나눠마셨다. 아마도 믹스커피를 바닥까지 비운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지 싶다.


오늘 할머니의 그릇들을 닦으며 바닥까지 찌든 때가 묻어있는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을 보며, 할머니의 잘려진 손가락이 떠오르고 그날의 그 믹스커피가 떠오른다. 멀쩡한 사람들에게는 두어 시간이면 다녀올 일본이, 할머니에게는 어쩌면 하늘나라보다 더 먼 그리움의 땅이 아닐까 생각하니 슬픔도 차오른다. 날이 조금 풀리면 할머니를 모셔와 처음 할머니가 샀을 때처럼 뽀얗고 반짝거리는 모습으로 변한 예쁜 찻잔에 다과를 대접해드려야겠다.


훗날, 내 아들일지 또는 다른 누구일지는 모르겠으나 나 다음에 살게 될 어느 누군가에게도 이 할머니의 가슴 아픈 스토리를 들려주고 이 그릇들도 물려주고 싶다. 사람은 사라져도 물건들은 스토리를 따라 흐르고 흘러 따뜻하고 소박한 우리네 삶의 한 부분으로 그렇게 오래오래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렇게나 먾운 그룻들이..
이렇게 모습이 바뀌엌다
할머니의 작은 그릇에 담겨있던 씨앗, 이 씨앗의 이름을 알아보니 범부채라고 하는 꽃이었다.
요건 팥 이겠지?

이렇게 반짝이는 찻잔

오랫동안 뜨거운 물안에 ~~~ 담가두었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와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