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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 May 10. 2018

[되돌려 주고, 되돌려 받고.]

치과에서 울고 웃다.


“이 틀니가 불편해요. 반품해 주세요.”


 평생 틀니를 만드는 치과의사 중에 이런 말을 듣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없다면 ‘아직’ 없을 따름입니다. 일종의 반품이지요. 사실 환자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민을 하고, 용기를 내어서 하는 말인지 모릅니다. 치과의사 입장에서는 참으로 그 동안 틀니를 만드느라 애쓴 정성도 내동댕이 쳐지는 느낌이고, 이 맞춤형 개인 물건을 어디 다른 곳에 쓰지도 못할 터이니, 사실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저 손해를 감수하고 버려야하는 입장이지요. 하지만 잘 만든 틀니라도 본인 취향에 안맞다면 상황은 발생하게 됩니다. 반품. 환불. 계약파기.  


 20년쯤 전에 여대생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관우야, 요즘 내 주변에 화장품을 구입한 뒤에, 반정도 덜어쓰고서 반품하는 친구들이 여럿있단다. 반품을 1주일이내에 하게되면 무조건 해주게 되어있어서 그게 생활의 지혜라나봐. 호호호.”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결국 화장품 회사는 이런 비양심의 소비자에게 군말없이 친절하게 환불을 해줍니다. 그러고는 잠자코 지내는 양심적인 소비자에게 그 손해 본 금액만큼을 부담시킵니다. 결국 5만원이면 구입하고 판매할 화장품 가격이, 6-7만원정도를 책정해야 회사는 목표한 수익을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 몫은 고스란히 다른 선량한 소비자에게 전가되지요.


세상 모든 것이 땀흘리지 않고 수확된 것이 없습니다.

 “장모님, 젊으셨을 때, 반품같은게 있었어요? "

 “반품? 뭐 먹을것도 마땅찮은데 반품할게 어디있겠나? 김서방. 그 땐 순 먹을거 정도지 지금처럼 물자를 마구 사는 시절도 아니고, 전자제품 같은것도 흔하지 않았잖아. 그냥 상한 과일을 속아서 사면 그 가게 다시 안가고 마는 정도였지뭐....”


 반품이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지요. (물건이 문제가 없는 경우) 이렇게 쉽게 반품되는 사회이니, 쉽게 결정하기도 좋습니다. 그냥 번복하면 되지요. 인간이란 원래 책임지기 싫어하는 동물이니까요.

문제는 판매자에게도 있죠. 홈쇼핑에서 10.9.8.7.6...분 남았습니다... 이제 빨리 주문하세요!.... 도무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일단 주문 먼저 해라, 인간이란 원래 양심상 반품을 미안해 하는 심리가 있으니 일단 구매결정부터 해라. 그게 장사의 기술이다. 하는 판매자의 비열한 심리에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상업화, 물질화 된 사회에서 이제는 흔히 애인 반품. 배우자 반품이라는 말조차 나오고 있습니다. 어차피 결혼이라는 것도 서로의 변심을 막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계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 틀린말은 아닐 수 있지만, 어딘지 서글퍼집니다.


 요령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사전에 주문해서 옷을 입고 며칠내에 반품을 하는 것입니다. 휴가철이면 텐트를 쓰고나서 반품을 하면 된답니다. 물건을 산 뒤에 단순변심으로 반품을 하면, 배송비가 소비자부담이 되니, 일부러 물건을 칼로 찢거나, 음식물 사이에 담배꽁초를 넣어서 반품하면 배송비까지 아낄 수 있다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명품을 사서 짝퉁으로 바꾸어 반품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애교스러운 일입니다. 이 정도 되면 범죄이지요. 양심이 부족한 사회에서, 죄없는 택배기사는 환경을 오염시키는 배기가스를 뿜어대며 비양심 소비자의 물건을 반품시키느라 오늘도 바쁩니다.


 세월만큼이나 주름진 손에 틀니가 쥐어져 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미안해서 도무지 말은 못했는데, 틀니가 너무 불편해.. 이걸 어쩌지? ” “네, 할머니 잠시만요..” 30대 젊은 처자일때부터 이를 모두 잃고서, 이제는 잇몸이 너무 없어 틀니가 불편한 할머니. 제가 10분만 손을 봐드리면 간단히 해결되어 방긋이 웃고 나가실 문제였는데, 지나친 양심으로, 배려심으로, 여린 마음으로 그동안 한 달이나 참으셨답니다. 문턱 높게 느끼게 해드린 제 잘못이 큽니다.


 어떤 할머니는 요양병원에서 일어나질 못하십니다. 한사코 틀니를 엘리베이터 없는 제 치과에서 하겠다고 업혀오시곤 해서 만들어 드렸는데, 그만 바닥에 떨어뜨려 한쪽이 날카롭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다시 제 치과에 오는 것이 미안하다고 수개월을 지내다가 “의사양반.. 이거 미안해.. 근데 참다 참다 도저히 안되겠어.. 손 좀 봐주시게나..” 입안의 상처로 오히려 제가 미안할 따름입니다. 마을에 등에 메고 다니는 치과 수리용 드릴을 가지고 다니는 치과의사가 한 명쯤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을 위해서..


 교육의 수준은 요즘의 젊은이들이 훨씬 높습니다만, 양심과 인심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훨씬 좋습니다. 머리라는 곳간 속, 인심이 채워질 자리에, 지식만 가득한가 봅니다. 폭주기관차 같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이 어려우신 할아버지 할머님과, 이제 다시는 안 당한다는 판매자와 소비자가 서로 칼을 갈면서 사는 이 시대가 참으로 저에게는 뿌옇고 답답합니다. 결국 우리가 환불받자고 싸우며 상대하는 직원도 약자이고, 환불을 받자고 나서는 사람도 약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견을 제시하고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이것은 작은 것에서 이기고 큰 사회의 합리성을 망치는 행위입니다.


 가까이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틀니가 불편하시다면, 가능한 만큼은 다니시던 치과에서 조정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안의 틀니는 “낭중지 추“ ( 囊中之錐 )가 아닌 ”구중지 추“가 되어 입 안 온 구석을 찌릅니다. (보통 어르신들은 잘 참으십니다. 물어보시길..) 혼자 살며 누구에게 이런 상의를 할 곳없는 노인 분들의 일상이 걱정되는 마음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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