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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Jun 10. 2023

이탈해서 다행이야

이탈하기 전엔, 그 길이 전부인 줄 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에게서 차마 멀어지지 못해 힘들어하던 시기가 있었다. 엄마 치마 끝에 매달린 아이처럼 손가락 끝에 간신히 부여잡은 그 끈 하나를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그 시기에 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상실감을 맛 봐야 했다. 분명 나를 보고 있지만 눈을 나를 향하지 않았고, 상대에게 건넨 말은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와 내 귀에만 꽂혔다. 거절 당할 것을 알면서도 자꾸 그 사람의 곁으로 파고 들어가려 했는데,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려는 나 스스로를 알아챌 때마다 굉장히 비참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건 외로움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벗어나길 소망했다.


새해를 이틀 정도 앞둔 어느 날, 친구 따라 술자리를 나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의 대타로서 친구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끌려나간 자리였다. 유치하게 미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와 남자 명 수를 맞춰 만난 모임이었는데, 난 그것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사실 난 한 해의 마지막 날, 또는 새해의 첫 날을 내가 놓지 못한 그 사람과 보낼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연신 핸드폰에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그건 내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한 남자가 계속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여기 너무 재미없죠?”

정말 뻔하디 뻔한 멘트. 그 말 때문에 지루함이 배가 되어 난 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전 같이 나갈 생각 없는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남자의 얼굴을 봤다. 재미없지 않냐고 말한 사람 치고는 얼굴이 매우 즐거워 보였다.


결국 난 그 해의 마지막 날, 그 남자와 만나 뮤지컬을 봤다. ‘김종욱 찾기’라는 작품이었는데 인기가 많았는지 작은 극장 안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의도하지 않아도 옆 사람과 바짝 앉아야 했던 그곳은 공기가 너무 더웠고, 사람들의 웃음 소리와 노래 소리가 귀에서 웅웅거렸다. 결국 그 뮤지컬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핸드폰에 온 신경이 가 있었을 때, 내가 간신히 부여 잡고 있던 끈이 탁, 하고 손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차마 놓지 못한 그 사람이, 기어이 나를 놓아 버렸다는 것을 안 순간 느닷없이 눈물은 터져나왔다. 아마도 공연 내내 울었던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끅끅거리는 나에게 남자는 연신 휴지를 건네 주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극장을 나와 그 남자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동안 남자는 왜 울었는지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그냥 내 앞에 수저를 놔 주고, 멀리 있는 음식은 가까이 밀어 주었으며, 물을 다 마신 게 보이면 따뜻한 물을 새로 부어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조곤 조곤 말해주었다. 난 결국 다음날도 그 남자와 만나 오래오래 걷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초에 내가 세웠던 계획은 모두 무너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탈해 보니 알 수 있었다. 내가 아주 오래된 늪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는 걸. 지금 다시 또 이탈해 본다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진흙탕으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 길이 좋다. 그때 그 손을 잡아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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