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식욕과 충동 식욕
우리 집의 소비는 늘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 그렇게 된 데에는 식비, 그 중에서도 아이의 식비로 쓰는 소비가 언제나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충동성,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이는 영상을 보다가 누군가 핫도그를 먹는 장면이 나오면 갑자기 핫도그를 주문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바로 지금 이 순간! 대령해야 한다고 성화다.
내가 하고 있던 일을 마무리하고 주겠다고 하면 옆에서 계속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결국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졸라댄다. 집에 핫도그가 없어서 조금 있다가 나가게 됐을 때 사 오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당장 사 오지 않으면 엄청 큰일이 날 것처럼 난리 법석이었다.
그래, 까짓 거 해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핫도그야 냉동실에 있는 것을 꺼내서 전자렌지에 1분 30초 동안 돌려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옷을 갈아 입고서 밖으로 나가 핫도그를 사 오면, 그래서 그걸 렌지에 돌려 먹기 좋게 물과 함께 건네주고 나면, 결국 아이는 한 두 입 정도만 먹고 접시를 저 멀리 밀어놓고 만다. 나는 결국 아이가 그렇게 할 것을 알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고 기꺼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대개 그런 양상이다.
영상 속에서 참치를 먹는 장면이 나오자 갑자기 참치를 찾고, 책을 보다가 소세지 먹는 장면이 나오면 평소에는 지겹다고 먹지 않던 소세지를 갑자기 먹고 싶다고 말을 바꾼다. 한동안 감자칩을 찾길래 그걸 한꺼번에 3-4개 정도 사 놓았더니 또 언제 그랬냐 싶게 감자칩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종 잡을 수 없다. 아이가 보는 영상과 책에 무엇이 나오느냐에 따라, 아이가 어떤 페이지를 보느냐에 따라, 또 기분에 따라 먹고 싶은 것은 늘상 바뀐다.
오늘 우리의 계획은 아침과 간식을 먹고 애슐리에 가서 디너를 먹고 나오는 것이었다. 저녁까지 무사히 먹고 그렇게 끝이 나나 싶었는데, 아이와 집으로 돌아가다가 우리는 우연히 야채를 동결 건조 시켜 파는 팝업 스토어를 지나치게 되었다. 모든 종류의 건조칩들을 그릇에 담아 맛볼 수 있게 해 놓은 곳이었다. 우리는 동결 건조시킨 딸기와 무화과를 먹고, 당근과 복숭아를 맛 보았다. 아이는 그닥 나쁘지 않았는지 다른 것에도 손을 댔는데, 예상 외로 아이가 맛있다고 더 집어 먹은 건 연근칩이었다.
아이는 반찬으로 한번도 연근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책에 나온 사진, 혹은 급식으로 나온 반찬을 눈으로만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연근칩을 먹고는 단박에 “나 이거 사 줘!”라고 말했다. 계획에 없던 소비였다. 연근칩은 70그램 짜리가 있고, 130그램 짜리가 있었는데 가격을 따지면 130그램짜리가 훨씬 저렴한 상품이었다. 우리는 130그램짜리 연근칩을 샀고 아이는 매우 신나 하면서 집에 가자마자 먹을 거라고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겠는가?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역시나 아이는 그릇에 담아 달라던 연근칩을 한 번 입에 넣고는 아무 말 없이 저 멀리로 밀어 놓았다. 식탁 끝까지 그릇을 밀어서 달랑거리며 떨어질 듯 말 듯 그릇은 위태롭게 놓여 있었다. 그러고는 아침에 자기가 싫다고 도리질을 쳤던 치킨 너겟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치킨 너겟을 달라며, 그것이 아니면 숨이 넘어갈 정도로 다급하게 굴기 시작했다.
치킨 너겟으로 밥 한 공기를 비운 아이는 한참 신나게 레고를 조립하는가 싶더나 곧이어 다시 배가 고프다며 케일과 쌈장을 요구했다. 예전에 제육볶음을 먹으면서 케일에 고기를 싸서 맛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꽤나 색다른 맛에 땡겼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넙죽넙죽 잘 받아 먹어 나름 뿌듯해 했는데, 불현듯 그게 생각났는지 느닷없이 케일을 사 달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11시. 마트도 문을 닫을 즈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케일을 사주지 못한 채 다른 대체거리로 아이의 관심을 돌리려 했지만 아이는 그저 막무가내다. 이런 경우가 제일 속상하다. 아이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한 입만 먹고 밀어놓았을 때 만큼이나 상처다.
나는 또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고 케일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나가지만 내가 사올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현관문을 막 나서려는 내 뒤통수에 대고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허니 버터 팝콘도!"
나는 다시 현관문을 나서며 이번엔 팝콘을 몇 개를 사야 할까 잠깐 생각했다. 다시 또 번거롭게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는 싫어서 아마도 팝콘을 여러 개 사게 되겠지, 그럼 아이는 팝콘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아이가 주문하는 음식을 일일이 코앞으로 마련하는 일에도 지쳐 버렸고, 그것을 끝내 외면하는 바람에 남은 음식물을 모두 처리하는 일도 지긋지긋하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배가 고프다거나 입맛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아이는 음식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만큼 배가 차 있는데도 '먹고 싶은 기분' 자체를 배가 고픈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하곤 했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의 충동적인 입맛 변화에 내가 이렇게 일일이 응해 주는 것이 잘 하는 짓인지도 의문이다.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 가서 생 전복을 따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다가 케익에 꽂혀 그것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진 않겠지? 입덧 심한 임산부마냥 구하기 힘든 음식을 달라고 졸라대면 어쩌나;; 흠, 아직까지는 내가 즉석으로 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