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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다연 Jan 28. 2022

설 명절 두 형님 이야기

나의 든든한 지원자 두 번째 형님


 설 명절 하면 어린 시절에는 일 년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쫑쫑 땋아 댕기머리 드리우며, 집집마다 어른들께 세배인사를 다닌다. 주머니에 가득한 세뱃돈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덕담으로 풍요롭고 화기애애한 그 시절이 빛바랜 추억으로 자리한 적이 있었다.

 설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너무도 다른 두 형님 이야기를 적어본다.      




 첫 번째 형님을 만나면서 명절에 대한 나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힌다. 

 큰 동서가 되는 그녀는 약간은 큰 키에 마르고 날카로운 외모를 소유라고 있었으며, 처음부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지 남편의 형제자매들은 정말 우애가 돈독했다. 마치 사회생활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들처럼 매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았다. 

 외롭게 자란 나는 늘 모여서 복작거리는 분위기의 시댁이 그다지 싫은 것도 아니었기에, 제일 어른인 형님이 시키는 데로 묵묵히 일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형님이라는 그녀는 식구들 모르게 수시로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나를 압박해 왔던 것이다.


 첫 아이를 출산했던 그해, 선천성 심장병이 있는 아이로 인해 병원을 쫓아다니느라 나 자신조차 돌볼 수 없었던 나날이었다. 아이를 낳은 지 보름이 지나 조리원에서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명절이 코앞이다.

 도저히 명절 전날 일을 하러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형님에게 전화를 한다.  

 형님은 펄쩍 뛰며 일할 사람도 없는데 안 오면 어쪄냐구 소리를 질러댄다.

 결혼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던 나로선, 그동안은 어떻게 명절 음식을 했는지 의문이다.


 결국 친정엄마가 없는 나는 이모님 한데 사정 이야기를 한다.

 이모님은 안쓰럽다며 전과 나물을 손수 만들어 놓을 테니 가져가기만 하라고 하신다.     


 형님에게 다시 전화를 한다.

 “ 형님, 제가 이번에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이모님이 차례음식 해주신다고 하니까 아침에 들고 갈게요. 죄송해요”

 형님은 다짜고짜 어디 차례음식을 이모님 손에 맡기냐고 역정을 낸다.


 “ 난 애 낳은 지 한 달도 안돼서, 친정엄마가 다 해줬는데. 동서는 어디 불경스럽게 친정엄마도 아닌 이모님 손에 차례음식을 맡겨” 비꼬듯 얄미운 목소리가 내 귀에 칼이 되어 들려온다.


 조금 있다가 이번에는 시누들 한 데서 전화가 온다. 그들은 작당을 했는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나에게 퍼붓기 시작한다.



 친정엄마 손은 괜찮고, 이모님 손은 무슨 더러운 손이라도 되는지 되묻고 싶다.

 엄마를 잃은 슬픔과, 모멸감이 교차하면서 서러움은 성난 파도처럼 밀려와 처참히 부서진다.

 시부모님이 계셨다면 과연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얼굴도 한 번 뵌 적 없는 분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고 눈물은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 표독스러운 첫 번째 형님의 결말은 다행히 2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는 사채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채무를 지고 있었으며, 외도녀로 3남매를 버린 비정한 엄마였다.

 그녀가 이혼을 해서 속으로는 정말 다행이다 싶었지만, 떼인 돈과 남겨진 아이들은 내게 또 하나의 족쇄가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버티어내고 명절마다 불편한 진실에 마주하며 살아온 나에게, 형님이란 존재는 정말 말만 들어도 유쾌하지가 않다.

 그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몇 해전 아주버님이 재혼 선언을 할 때에도 그다지 달갑진 않았다.      


 두 번째 형님은 자그마한 몸집에 뭐든지 다 작고 아담한 사이즈로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닌 분이다. 이 대식구 가정에 집안일이나 하겠나 싶어 별 기대도 없었고, 그저 잡음 없이 두 분이 잘 살아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보기와는 다르게 새로 오신 형님은 야무지게 모든 일을 혼자서 척척 해 나갈 뿐 아니라 교통정리도 확실했다. 그 작은 체구에서 힘과 카리스마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나에게 든든한 지원자가 생김은 분명하다.


 나는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식당에나 있을법한 대형 냄비나 솥들을 이용해서 대식구의 음식을 뚝딱하고 만들어내는가 하면, 김치 담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김치와 간장, 된장 매번 챙겨서 보내주시고, 명절에도 형님이 다 준비하셔서 요즘의 나는 손이 좀 민망한 편이다.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이제는 좀 쉬라며, 챙겨주시는 형님이 언니 같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하다. 예전의 주부 9단인 나는 어느새 없어지고, 이제는 서성거리다 형님만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하늘에서 선녀라도 내려주신 것인지 새로운 형님은 고마움 그 자체이다. 어느새 우리 가족은 새로운 형님으로 인해 가족애와 화목함을 되찾는다. 


 이제 자식들이 하나둘 결혼해 손녀까지 본 형님은 며느리 시집살이를 자처해서 하고 계신다.

 손녀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요즘은 여유와 낭만을 즐기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삶에 늘 감사를 표하는 그녀에게서 이전의 삶이 나만큼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선한 영향력이 곳곳에 퍼져 우리 가족이 늘 행복하고 따뜻해질 수 있기를 바람 하면서,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명절 음식 준비로 많이 힘든 날, 가족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위안이 되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마음이 공존하는 설 명절이 되기를 바람 한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은 우리 형님에게는 예외인 것 같다.     







#책과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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