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나이에 관한 한 굳건한 보수 견해를 유지해 왔다. 장유유서 관념은 특유의 교착어 어법에 맞춰 발달한 존대법과 상호호응해 왔다. 그 결과 나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이는 어른으로, 그 반대는 어린 이로 대우한다. 여기서 ‘어른(얼운)’이란 ‘사회에 나가 책임을 다하는 성숙한 이’를 말한다. 어른은 대접만 받는 게 아니라 어른답게 행동해야 한다. 물론 젊은이도 어른답다면 ‘점잖다(젊지 않다)’는 호평을 얻는다. 말로만 보면 한국인은 모두 성숙한 자, 조숙한 자 혹은 조로한 자들이어야 한다. 유교 가치는 많이 무너졌지만 아직도 나이는 사람들을 구속하고 한정하는 틀이다.
최근에는 이와 반대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식상할 정도로 자주 들린다. 어른-되기 혹은 늙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주로 장년층 이상이다. 지식도, 힘도 더군다나 경험도 있는데 이대로 물러서는 게 억울하다. 나이 때문에 도전하고 즐길 일이 줄어드는 건 씁쓸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는 일이 인간적 성숙도를 점검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사례를 보자.
사례 1) 2023,12 지하철 입구. 등산복을 입은 70대 전후 남녀 노인들이 초저녁부터 꽤 취한 채 걸어간다. 붉은 입술의 두 여성이 이 남자, 저 남자 팔짱을 바꿔 껴 가며 요란하게 웃는다. 그 모습이 교태스럽다. 한 남자는 여자들에게 오늘 집에 가지 말라고 목청을 높인다.
사례 2) 2024.2 선수 숙소. 선수단 주장이자 고참인 A는 후배 선수들에게 다음 날 경기를 위해 쉬라고 말한다. 후배들은 A의 권고를 묵살한 채 여가 운동에 열중한다. 화가 난 A는 후배들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B선수의 멱살을 쥐었고 B도 지지 않고 A의 멱살을 쥐더니 주먹까지 날렸다.
사례 1은 남의 눈으로 볼 때 소위 ‘나잇값’을 안 하거나 못하는 노인들의 모습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몸으로 마음으로 표출한다. 만일 이들이 20대였다면 어땠을까. 전혀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청춘은 원래 연애하는 이들임을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인들은 아닐까? 사례 2는 후배가 하늘 같은 선배와 맞짱 뜨려는 현실의 단면도이다. 여론이 좋지 못하자 B는 A를 찾아가 사과하고 화해를 청했다. 위계가 엄격했던 스포츠계에서도 연공서열을 무시하는 ‘하극상’이 잦다고 하니 다른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논어 위정 편에는 연령별 이칭이 등장한다. 공자의 생애를 요약한 ‘지입불지이종’이다. 내용을 보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새삼스럽기만 하다. ‘15세 志學, 학문에 뜻을 둔다. 30세 立志, 뜻을 세운다. 40세 不惑, 미혹되지 않는다. 50세 知天命, 하늘의 뜻을 안다. 60세 耳順,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한다. 70세 從心,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동방의 선비들은 공자를 이상적인 군자라고 여겨 따르려고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향이 자신의 본질과 너무 달라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위선자들을 양산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쇠와 죽음은 인간 삶에 필연적이다. 발전이 있으면 쇠퇴가 기다린다. 공자의 생애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충만하다. 공자가 살았던 BC 5세기 의학, 과학 수준 그리고 빈번한 전쟁 와중에서 한 인간이 갈 길은 그리 폭넓지 않았다. 인간 공자는 혼탁한 세상에서도 하늘의 법을 공부하고 깨달아 고요한 심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의 삶은 완숙한 인간으로의 길을 안내하는 지표와 같다.
아이들은 세상의 의무나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들이다. 본능적, 개인적인 욕구에나 충실하면 된다. 반면 성숙한 인간에게는 할 일이 많다. 돌아봐야 할 것투성이다. 젊은 늙은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심지어 십 대, 이십 대 청춘도 늙어가는 일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늙음이 추와 혐오의 동의어가 되어간다. 사람들은 어쩌면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두려워한다. 우리 시대에 이미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인간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한다. 벌써 그 비법을 알아내려는 연구가 한창이다. 만일 늙거나 죽지 않는다면 ‘성숙한 인간’ 운운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