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오면서 달라진 것들이 많았다. 예전 사람들은 사회가 부여한 종교, 이념, 규범대로 살았다. 개인이라는개념을제대로 누리고 살았던 이는 드물었다. 개인, 자유, 고독 이런 건 그리 오래지 않은 개념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은20세기 초반 사람들이 겪은 존재론적 혼란을 주제로 삼았다.
피아노 건반은 7¼ 옥타브 88개이다. 작곡가나 연주자는 그것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낸다. 만일 이 건반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실제로 88개가 넘는 피아노도 가능하다고도 하니까. 인도 음악은 수백 개가 넘는 음계나 선법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반음보다 더 좁은 음정도 많다고 하니 건반 수도늘어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즐거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악기로 연주하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갈 길이 사방팔방 도열하듯 나타난다면 그건 공포나 다름없지 않을까. 무한의 건반이 만드는 무한의 세상은 시작부터 두렵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은 나인틴 헌드레드 1900(노베첸토, 20세기)이다. 때는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대서양 횡단 이주가 활발했던 시기다. 갓난아기가 유람선 안에서 버려진 채 발견됐는데 선원들은 그에게 1900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해는 1900년, 20세기가 막 눈을 뜬 때이다. 태어날 때부터 호화유람선의 파티에 익숙했던 소년은 피아노 연주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다. 레슨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러나 깊은 밤 혼자 하는 연습만으로 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는 88개 안에서 행복하다. 오히려 건반이 넘친다고 생각한다. 배와 피아노, 그것이 그의 세계다. 그 외의 세상은 없는 거나 다름없다.
자유는 고독이며 공포다. 차라리 커튼을 내려 그 너머를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이 안은 안전하다. 그는 비록 선실의 가장 아래 어두운 바닥에서 살았지만 파티가 열리는 밤이면 꿈의 궁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곳이라야 편안하고 안온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진실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누구든 ‘매트릭스’의 네오가 되는 건 아니니까. 진짜는 모른 채, 아니 모르는 척하며 산다. 1900은 그걸 택했다.
1900은 무수히 갈라지는 길들을 바라본다.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는 몇 걸음도 걷지 않아 또 다른 갈래길을 만난다. 잠시 망설이지만 하나를 택한다. 그리고 몇 걸음 가서 또 갈래를 만나고. 이런 선택을 영원히 계속해야 하는 운명을 바라본다. 만일 정해져 있다면 걱정할 일도 없겠지. 가야 할 길이 명쾌하게 가는 자는 즐겁다. 그에게는 갈 길을 가는 자가 누리는 평화가 있다.
그래서 1900은 88개 안에 머문다. 땅을 디딘 적도 없고 딛고 싶지도 않다. 정해진 곳에서 주어진 방식대로 살리라. 태어나고 자란 유람선, 그의 세계는 완전하다. 그러나 유람선도 수명이란 게 있으니 1940년대 중반쯤이면 거대한 배도 고물이 되어 폐기될 처지가 된다. 1900은 억지 추방 단계에 이르자 배에 숨어들어 함께 가라앉기를 소망한다. 그에게 있어 배 바깥은 실재계를 의미한다. 차라리 배 안에서 봉인되는 게 낫다. ‘매트릭스’와 ‘트루먼 쇼’를 반쯤 닮은 영화다.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다. 기나라 사람은 근심이 많다. 그는 하늘이 꺼질까 땅이 무너질까 늘 걱정이다. 외출도 못하고 늘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현실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내부에 숨어들어 안전하게 머물고만 싶다. 진실의 눈을 뜰 필요가 있을까. 그게 행복이냐 불행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진실이 중요한가, 행복이 중요한가. 대부분은 행복을 택할 것이다.
진실이란 내 눈앞에 장막을 씌운 누군가를, 어떤 체제를 똑바로 쳐다본다는 거다. 맨눈으로 진실을 보았다고 보상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실존과 고독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그래서 기나라 사람은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토마스의 만(1875~1955)은 평생 ‘그릇된 길에 접어든 시민’이라는 의식에 고통스러워 한 인물이다. 그의 단편 ‘토니오 크뢰거’(1903)의 주인공은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1900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며 비슷한 고뇌에 시달린다. 토니오 크뢰거의 부친은 청교도적인 데다, 명상적이며 철저한 인물인 반면, 모친은 불확실한 이국적 혈통을 지녔다. 그녀는 비상한 위험성의 소유자다. 그래서일까. 토니오는 어려서부터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음을 자각한다.
자신이 성장한 독일 북쪽 해안도시, 즉 부친 계열은 건실한 시민 의식을 존중한다. 그곳 사람들은 ‘인간의 내부를 단순한 것, 진심인 것, 유쾌하고 정상적인 것, 비천재적인 것, 단정한 것’으로 채울 줄 아는 이들이다. ‘생동하는 밝은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이다. 이 도시는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이 넘치는 장소다. 1900가 그토록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 배 안의 세상이다.
동시에 토니오 크뢰거의 내부는 선량한 시민 의식을 걷어차고 싶은 마음으로 들끓는다. 그는 ‘아름답고 관능적이고 소박한 동시에 태만하고 정열적이고 충동적 방종’의 세계를 걷고 싶다. 사람을 얼얼하게 만드는 둔중한 포효 속에 침잠해서 바람과 물보라에 휩싸이는 걸 너무나 사랑한다. 외부는 이런 사람을 유혹한다. 그는 북부 뤼벡을 떠나 함부르크, 덴마크, 스웨덴 등을 유랑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신이 그릇된 길로 접어든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길에서 만나는 동료들이라고 해봐야 ‘언제나 괴로워하고 동경에 젖어 있는 불쌍한 사람들 뿐’이다. 그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는 이질적인 두 기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예술의 세계 속으로 길을 잃은 시민, 훌륭한 가정교육에 대한 향수를 지닌 보헤미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예술가’로 성장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종류의 인간한테는 올바른 길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필연’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건실한 시민들의 언어와 자신과 같은 모험가, 예술가들의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 걸 인식한다. 그는 알을 깨고 나왔다. 더 큰 세계로 도약한다. 그의 창조를 기다리는 피조물들에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면서. 20세기 현대인이 출현한다.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에 나오는 스티어포스는 누군가 자신을 안내해 줄 손이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물론 그건 중세나 근대 초기까지만 해당되는 일이다. 20세기 이후로 대부분 사람들은 상대적인 비중을 봐가며 스스로 취사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은 완벽하지 않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88개 건반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00 앞에 놓인 것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을 갈래 중 하나를 가야 한다. 우리는 곁눈질을 한다. 그래서 산만하고 어수선하다. 어떻게 하루를 넘겼다 해도 다음 날 또 다른 선택지가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일생이 간다.
차이와 반복, 그 사이는 거대하면서도 미세하다. 의도적으로 같은 일을 거듭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어제와 미세하게 차이나는 다른 삶을 만들어내는 이도 있다. 19세기말 사람들은 어두운 알 속에 머물거나 깨고 나오는 일에 깊은 고뇌를 동반했던 것 같다. 익숙한 세계에 머물면 안전하다. 그곳을 깨뜨리고 나오는 일은 위험하고 고통스럽다. 바깥에는 고독, 불안 그리고 자유가 기다리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