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앨리스 Dec 14. 2021

아직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

-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매년 5월이면 광주를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레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갖게 되지만,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광주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의 자유로운 일상의 삶과 연결하여 생각해보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유신 헌법의 7차 개헌까지 이어진 박정희 정권은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와 국가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개헌을 정당화하였고,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합리화 문구로 가장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력하고 견고히 하는데 온 힘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10.26 사태로 7년 뒤 끝나버린 유신의 칼바람. 민주주의의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이 12.12 사태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중심의 신군부로 인하여 여전히 봄은 오지 않았다. 유신 헌법 유지와 계엄령 확대로 서울의 봄을 대신했던 신군부 세력의 말도 안 되는 행보에 따르지 않았던 곳이 바로 ‘광주’였고 그렇게 소년이 온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지키기 위해 준비되었던 무기들이 향한 방향은 국민이었고 공수부대의 거센 진압에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었던 시민들은 시민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했던 것만큼 모순적인 일이 있을까? 운명의 장난처럼 6월 민주항쟁으로 7년 뒤 끝나버린 신군부의 총성은 마치 유신이 7년 뒤 10.26 사태로 멈춘 것과 같이 역사는 분명 우리들에게 예고했다는 듯한 메시지를 남겼고,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는 비극적인 화려한 휴가로 붉게 물들었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에 있을까.
- 1장 어린 새 p.23


상무관에서 동호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던 수많은 시신들의 묘사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서고자 했던 희생자들의 숭고한 뜻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혼이 되어 다른 시신들과 함께 겹겹이 포개진 자신의 피투성이 육신을 내려다보며 쇠파리들과 날파리떼를 쫓을 수도 없는 처절한 1인칭 시점의 묘사 또한 공수부대 진압의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책장이 넘어가는 장마다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주인공들의 여러 시선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누르기 위한 권력의 폭력성과 잔인함, 인권의 존엄성,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저항의 DNA를 읽을 수 있었다. 옴니버스 구성은 80년 광주의 이야기가 현재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모든 이의 안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해주고 있는 듯하다.


끔찍한 그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유리로 만든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놓아버린 사람들, 자신을 놓아버린 그 사람들이 가엾고 안타까워 다시 그 사람들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지울 수도 없어 안고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80년 광주는 일상과 함께 계속 떠오르고, 아직 진행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6장 꽃 핀 쪽으로 p.181


여섯 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 6장 꽃 핀 쪽으로 p.184


남겨질 동생을 마음 아파하며 어딘가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죽어갔을 정미와, 눈을 감아서도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누나에 대해 눈물지었던 정대, 아들의 16살의 모습이 기억의 마지막인 엄마의 절규와 저녁밥을 같이 먹기로 한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죽어간 동호,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큰형과 작은형… 5.18 민주화운동은 한편으로는 수많은 가족의 비극이었다.




책의 여러 묘사 중 희생된 시신의 묘사보다도 더 끔찍하다고 느껴졌던 부분, 4장의 쇠와 피. 공수부대에 끌려간 나와 진수, 그리고 16살 영재가 고문을 당하는 과정의 이야기와 이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자들이 감시하기 위해 서있던 곳이 파놉티콘 구조의 감옥이었음을 알 수 있는 묘사에서 서대문 형무소를 떠올렸고, 의식의 흐름은 섯알오름 불법 주륙기(不法誅戮記)의 학살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나쁜 짓은 가장 빨리 배운다고 했던가. 일제의 잔혹함과 비인간적인 짓들을 우리가 지탄할 수 있는 것인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딘가 흘러간 것 같지만 우리 사회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숨겨져 있는 비열함, 잔혹함, 광기 어린 시선들을 우리는 어떻게 소거(掃去)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이 책을 읽은 후의 우리에게, 나에게 남은 역사 숙제라고 생각한다. 내 뒤를 이어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하기 위한 진심을 담은 숙제.


윤리적 파동의 힘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3장 일곱 개의 뺨 p.95



5.18 민주화운동은 단순히 1980년 5월 18일 단 하루에 일어났던 저항이 아니었다는 것과 그 현장에서 발생된 윤리적 파동이 얼마나 숭고한 마음으로 일어난 것인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짓밟기 위해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해야 했는지를. 그리고 군인이 곧 ‘나라’가 아니라고 은숙이 동호에게 알려주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 이 민주화 운동이 직선제의 씨앗이 되었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므로 무관심함을 버리고 고민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이다.


동호의 실제 모델이 된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 군이 도청 바닥에 교련복을 입은채 잠든 마지막 모습이 담긴 사진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가슴 아픈 마지막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신이 있다면 더 이상 인간이길 포기했던 군 통수권자의 마지막은 더 끔찍해야할 것이며 죽어서도 처절할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마음에 눈물을 주고 너의 가슴에 한을 남긴 이승의 못다 이룬 서러운 인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다시 만나리.” -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군의 묘비 뒷면




글을 작성하던 중 공교롭게도 오늘 오전 뉴스 속보로 그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그는 사죄의 한 마디 없이 갔다. 2021.11.2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