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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Dec 20. 2021

아빠의 글씨

세 번째 기일을 앞두고 아빠를 추억하며

마음의 서랍에 오래 보관해두었다 꺼내는 글입니다. 아빠와 3년째 매일 이별하고 있지만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려 합니다.


2018년 12월 2일 자정이 넘은 시간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 해 여름 아빠의 눈은 노란 보름달이 뜬 것만 같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시는 데다 거동이 힘드시다 보니 더운 날씨에 어떻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이 세상 누구보다 매일매일이 두려우셨을 텐데 내 두려움만 보였던 나는 철이 없었던 것이었다.


정기진료가 예약되어 있던 날 아빠를 모시러 친정집으로 갔더니 거동이 힘든 상태에서도 금색 보따리 두 개를 챙겨두셨었고 이것부터 차에 실으라며 여러 번 강조하셨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아빠를 병원까지 안전하게 시간 안에 모시고 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보따리를 차에 실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크게 궁금하지 않았었다. 아빠가 간성혼수로 인지가 흐릿해지며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실 때가 많았기 때문에 일단 말씀하신 데로 차에 싣고 거동이 힘든 아빠를 차에 태워드리는데만 30분, 어렵게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대학병원은 예약이 되어있어도 대기시간 한 시간은 기본인데 괜히 간호사에게 화를 내는 아빠는 다시 간성혼수가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잘 드시고 집에서 요양하시라는 늘 똑같은 말씀만 하시는 의사분께 기력이 없으시니 입원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건 냉랭한 반응뿐이었다.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어 입원이 의미 없다 했지만 무조건 입원을 시켜달라며 엄마와 애원했고 아빠께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면 집으로 다시 모시겠다 했던 그 약속을 나는 지키지 못했다. 병원이 싫다며 집으로 가고 싶으시다는 바람을 수 없이 말씀하셨는데 마지막 병원생활 5개월 후 유골함으로 집에 모시고 왔던 날 나는 "피눈물이 난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빠와 함께했던 마지막


내 나이 25살 때 아빠의 뇌종양수술 후 알게 된 원인을 알 수 없는 간경화. 술, 담배를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뇌종양 수술이 끝나면 다 끝나는 일인 줄 알았었다. 15년의 간경화 투병에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는 병원과 그래도 더 치료를 해달라는 실랑이가 끝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듯, 돌아가시기 4일 전 담당의가 말했다. 주말을 넘기지 못하실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고 슬픔이 내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수요일부터 악화된 아빠의 상태는 결국 토요일 오전 간호사 데스크 바로 옆 임종실 공간으로 옮겨졌고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주말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눈이 쑥 들어간 얼굴로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는 또 다른, 하지만 나와 같은 처지의 딸 보호자 한 분을 위로하고 계셨다. 그 시간 그곳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그 상황이 나는 너무도 두렵기만 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주무시는 듯이 의식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빠를 부르자 아빠의 심박수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빠의 심박수가 나에게 대답을 해주는 것만 같았다. 분명 아빠는 듣고 계셨다. 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아빠의 얼굴과 손, 아빠의 발을 만지며 꼭 기억하고 싶어서 모든 것을 사진 찍어두었다.


그러면서도 아니길 바랬는데 결국 자정을 넘겨 일요일이 되자 아빠의 손과 발끝의 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빠의 상태를 확인하는 장치가 내는 소름 돋는 비상벨 소리를 듣고 뛰어온 간호사는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있다며 아빠의 입 안과 코 안을 살피더니 임종의 순간이라 했다. 지금 다 듣고 계시니 울지 말고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절대 울지 말고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라고 했는데 그 순간부터 나는 정신없이 울었던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할 말은 해야 했기에 엄마 걱정 마시라고, 아빠 안녕히 가시라고,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울부짖어지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어서 내 마지막 인사가 아빠께 잘 전달이 되었는지 아무리 확인하고 싶어도 나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순간 아빠는 꾹꾹 누르며 버티고 버텨왔던 복수(腹水)의 그 엄청난 무게감과 고통을 덜어내고 엄마의 마지막 인사 속에 담당의가 말했던 주말이라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 하늘 산책길에 오르셨다.


OO아빠, 수십 년간 고생 많이 했어.
이제 하늘나라 가서 아프지 말고 편히 쉬어요.




준비된 이별이란 없다.


자존심이 강했던 경상도 사나이 아빠의 유언은 딱 두 가지였다. 본인이 많이 아파서 이 생을 떠난 것을 외부에 알리지 말고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과 큰 딸인 내가 살고 있는 곳 가까운 장례식장과 화장시설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집 근처 가까운 곳에 새로 지은 밝고 깨끗한 장례식장이 있어 그곳으로 정하고 아빠가 원하셨던 것들이 가능한 빈소를 마련하여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에게만 연락하였고 그렇게 3일간의 장례는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진행이 되었다.


나중에서야 여러 어르신들께 들은 이야기지만, 유언을 가족장으로 치르라는 것과 딸이 사는 곳 근처 장례식장을 말씀하신 것은 본인 장례 때문에 손님 치르느라 딸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딸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담은 유언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글씨를 정말 잘 쓰셨다. 그리고 나는 한글을 떼지 못한 채로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몇 안 되는 아이 중 한 명이었는데, 졸업할 때에는 한글 경시대회 상을 매년 휩쓴 학교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는 아이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자란다고 나는 아빠가 글씨를 잘 쓰신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부터 아빠의 글씨를 따라 썼던 것 같다. 심심할 때마다 아빠의 그림을 따라 그렸고 아빠의 글씨를 따라 쓴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아빠가 한 번도 나를 앉혀놓고 글씨를 가르쳐주신 적은 없지만 글씨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배운 것처럼 나는 어딜 가도 글씨 참 잘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아빠의 글씨


아빠는 내가 결혼을 준비하던 때에도 편찮으셨었는데 힘든 상황에서도 사돈 댁으로 보내던 예단 안에 직접 한지에 품목을 써서 정성스레 보내주셨다. 나에게도 시아버지께 편지를 쓰라고 하셔서 예비 시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썼고 그 편지의 봉투에 반듯하고 예쁜 글씨로 “아버님께”라고 써주셨다.


시간이 흘러 잊고 지냈던 그 봉투들을 발견한 것은 결혼 후 한참 뒤였다. 시아버지께서 보관한다고 하셨겠지만 아무렇게나 보관되어, 함께 있을 이유가 없는 물건들 사이에 놓여있는 아빠의 글씨를 발견하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챙겨두었고 그날 이후부터는 내가 보관하게 되었다. 그 일로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그 가치는 잊혀져도 되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한 것이고 종이 한 장이라도 의미를 담아 소중히 여기면 역사가 담겨있는 보물이 되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보자기 하나는 거꾸로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정신이 드니 아빠가 실어두라하셨던  그 금색 보따리 두 개가 생각났다. 정신없는 와중에 보따리 두 개를 고이 집 주방 펜트리 공간에 잘 갖다 놓아두었었다는 것도 잊고 있다가 한참 뒤 보자기를 열어본 순간 나에게 화가 났고 아빠가 어떤 생각으로 이 보자기를 싸셨을지 생각하니 한없이 슬퍼졌다. 아빠가 그렇게 강조하며 잘 실으라 하셨던  그 금색 보자기에 싸인 것은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도 직접 담그셨던 담금주였고 간성혼수로 정신이 없는 사이에도 사돈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선물이었던 것이었다.



예쁜 쇼핑백과 예쁜 보자기를 구하고 싶으셨겠지만, 거동이 힘들고 그 자존심에 누구에게도 부탁하고 싶지 않아 집에 있는 쇼핑백과 사용했던 보자기로 포장을 하신 듯했다. 금색 보자기 안에 싸여있던 두 병의 담금주를 담은 쇼핑백에는 아빠의 글씨가 남아있었다. 늘 반듯하게 같은 크기로 잘 쓰셨던 아빠의 글씨는 힘이 없었고 반듯하지 못했으며 실수도 남아있었다. 자신처럼 아프지 말고 건강하시라고, 그리고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마음이셨으리라. 너무도 힘들게 적으셨을, 병원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처럼 이것부터 차에 실으라 하셨던, 그 금색 보자기의 담금주 두 병은 아빠의 바람대로 되지는 못했다. 아빠의 담금주가 사돈에게 영원히 전해지지는 못한다는 것 역시 아빠의 애통한 사연이 되었다.


그래서 아빠의 기일 즈음이 되면 나는 기능이 떨어진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한 없이 슬프고 슬프다. 올 해도 아빠의 글씨를 보며 홀로 큰 소리 내어 울었다. 또 그것이 아빠를 추억하고 기억하는 나의 방법이기에.


아빠의 글씨는 나의 자랑이자 아픔이다.


투병생활 십년 째 되던 해 손녀에게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往而不可追者年也, 去而不見者親也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네.
흘러가면 쫒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요,
가시면 다시 볼 수 없는 것도 어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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