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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로암 Nov 08. 2024

상담

공부방 일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싫은 일은 있다. 그것은 상담. 

상담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특히 긴 상담을 끝내면 손떨림, 가슴떨림, 오한, 메슥거림 같은 신체적 반응이 나타날 정도로 고역인 작업이다. 지금까지 나는 과도한 요구를 하는 학부모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상담은 내게 힘겨운 일이다. 


학부모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주제가 그의 자식이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그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학부모는 거기다가 그 아이가 공부까지 잘해야 된다. 

아이의 공부를 위해 고용된 마당에 아이의 행복을 위한다는 말은 프로로서 부적합할 수 있다. 

대부분 공부를 안 하는 쪽이 당장 행복하니까.


이틀 동안 남매의 상담을 했다.

이 독특한 남매는 놀이터에서 주워왔다.

놀이터 바로 앞에 있는 공부방이라 가끔 놀이터에서 고객님을 주워온다. 

처음 상담할 때 이 보호자는 내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아이는 또라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어머니 저는 또라이 좋아합니다. 재밌잖아요"


이 또라이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90분 수업 중에 60분을 아주 깊은 잠에 빠졌고 30분 동안 아주 밀도 있게 공부했다. 

흔들고 (어깨를 잡고 짤짤짤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라고!) 

친구들이 숙덕 숙덕거려도 이 또라이를 의식의 영역에 데려올 수가 없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반복되자 이건 또라이가 아니라 정말 병인가 싶어서

보호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담히 보호자는 말했다

"정말 졸려서 자는 걸 거예요"

병은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또라이가 그렇게 잠든 이유는 두 달 뒤에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다닌 학원에서 진도를 따라잡지 못해 보강을 하고

보강을 하면서 길어진 수업시간을 견디지 못해 잠들기 시작했고 

잠을 자니까 또 진도가 느려져 보강시간이 더 길어지고

혼이 나고 상담하고 다시 자고... 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깊게 잠들게 되었다고 또라이가 말했다. 

이제 또라이는 가끔 졸기는 하지만 깨우면 제대로 정신을 차린다.

그런 폭력적인 잠은 안 잔다. 휴 고쳤어 고쳤어.


이 녀석은 수학을 매우 꼼꼼하게 풀었다.

모든 문제의 풀이를 하나하나 바른 글씨로 적었고 숙제도 잘해왔다.

수학점수는 수직상승했다. 오예.

그리고 과학을 7점 받아왔다. 네?

주 1회 과학수업도 하기 때문에 권해봤더니 듣겠다고 했다.

과학도 매우 꼼꼼하게 공부했다.

다음 시험에서 과학을 73점 받았다. 점수 10배 상승!

같은 시험에서 국어는 무려 0점을 받고 역사는 13점을 받았다.

편차가 어마어마한 또라이인 것이다. 


지적호기심이 강하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그 능력을 쓸 수 있는 한계 또한 명확했다. 

 보호자는 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이 아이는 한정된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능력이 있는 아이이고

그것은 흔한 능력이 아니라고.

전화기 너머의 보호자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또라이의 선생님은 흥미롭게 이 아이를 관찰할 수 있지만

또라이의 부모님은 이 새끼를 어쩌나 속이 터질 테니까.

 

"전 이 아이가 좋습니다. 마음을 쉽게 여는 아이가 아닌데 내게 마음을 열어준 것도 고맙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아요. 이 아이와 하는 대화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


또라이의 보호자가 조금 웃는 것이 느껴졌다.


길었던 통화를 마치고 종료버튼을 누른다.

길게 숨을 내뱉고 이상한 리듬으로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차가워진 손을 주물러 피를 돌게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서성인다.


보호자는 애를 사랑하고

애는 선생님을 믿고 있고

선생님은 애가 흥미롭고

다 좋은데도 상담은 힘들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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