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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윤 Jun 13. 2024

사람의 깊은 슬픔

사람의 깊은 슬픔



 
우리는 늘 곁에 있던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습니다. 가장 큰 아픔, 가장 큰 슬픔, 가장 끔찍한 상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이를 잃고 무엇으로도 위로될 수 없는 슬픔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섣부른 위로가 오히려 더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그들의 옆에서 함께 울어줄 수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상담실을 찾아왔던 한 내담자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어 죽고싶다고 호소했었습니다. 사이가 좋았던 부부 중 한사람이 사별의 아픔을 겪게되면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게 됩니다. 그 고통이 극심한 우울증을 만들고 생의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식을 잃고 찾아온 부모, 형제의 자살을 목격한 청년, 교통사고로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다며 통곡하던 소녀의 울음 가득한 얼굴,... 그 모든 슬픔들을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가족 한 사람의 죽음이 가져오는 비극과 상실의 아픔과 그들을 추억하는 고통과 이별의 슬픔 등이 가족 모두에게 얼마나 크게 휘몰아치는지를 나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5단계를 거론하면서,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를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상실의 사실을 부정하다가, 그 다음 그 일이 자신에게 발생한 것에 대해 분노를 폭발하고, 그 다음에는 그 일에 대해 타협하고 나면, 깊은 우울 속에 갇혀 극도로 의기소침해지다가, 마침내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수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없이 바로 수용하는 사람이 위대하거나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슬픔의 치유는 치유하는 공간과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애도의 시간이 길다해도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치유그룹도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치유합니다. 아픔이 또 다른 아픔을 치유합니다. 우리는 상실의 아픔과 슬픔을 경험하게 될 때 내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울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위로의 말 때문이 아니라 내 슬픔을 받아주고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신앙 깊은 사람은 슬퍼하면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아진다”,
“될 수 있으면 잊어버리고 바쁘게 살아라” 등의 통념이 슬픔을 치유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슬픈 모습이 약한 모습이라는 인식이 더 깊은 상처로 새겨집니다.
 
슬픔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섣불리 위로하려 들지 말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옆에서 슬픔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함께 울어주면 됩니다. 슬픔은 상실에 대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가족과의 마지막 이별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요? 슬픔을 충분히 슬퍼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슬픔의 고통이 배어나와 괴롭히게 됩니다.
 
눈물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슬픔이 나약한 것도 아닙니다.  
충분히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의 시간은 아름답고 빛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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