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에 조금도 가깝지 않은 INFP는 조직 생활이 힘이 든다.
외국처럼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하고 점심시간도 철저히 개인시간으로 보장되며 회식이라는 용어 따위조차 없는 곳에서 일한다면 조직 생활에 맞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고민이 없을 것 같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으로 모르는 것이 있어도 정말 긴급상황!! 이 아니면 물어보지 않는데, 그날은 급했나 보다. 전임자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 친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경우도 있어 그날은 안면이 조금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급하게 물어봤다. 아마도 그 사람은 거절한 기억을 하지 못하겠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 안면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물어본 나의 잘못이라 생각했고,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업무적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거절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 사람이 받을 상처까지 생각하니 거절을 더 못하게 되었다.
우리 조직이라는 것이 전임자 잘못 만나면 10분에 끝낼 수 있는 것도 1시간을 알아봐야 하기 때문에 그런 물음들에 "저도 일이 많아서요" 하며 거절한 적은 없다. 사실 그런 도움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것은 아니기에 성격에 맞지 않게 메몰차게 거절할 생각은 없다. 거절을 하고 나면 마음이 더 편치 않기에 마음 편한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나의 기분에 더 충실하기로 했다. 거절당해서 기분 나쁘면 그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하고 내 기분이 좀 나쁘네 하면 그만이다. 거절할 때도 남의 평팡보다 내 기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어차피 사람은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 없으니, 이 정도 거절로 유지되지 못할 인간관계라면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 기준에서 가능하면 들어주고, 내 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면 거절하면 된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이 조직에 들어와서 거절을 못했던 것이 일과 후의 술자리였다. 술을 싫어하기보다 오히려 술자리를 좋아했기에 처음에는 거절하지 않고 따라다녔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포지션을 처음부터 잘 잡아야 한다. 정말 극강으로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적절히 거절하는 것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필요하다. 그전까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대부분이었기에 그러한 술자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와 회식이 아닌 회식 같은 술자리의 다른 점은 재미도 없고, 할 말도 없으며, 편하지도 않고, 남는 것도 없고 시간도 아까웠다. 그럼에도 거절을 못하고 나갔던 이유는 변명하는 데도 익숙지 않았고, 변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집착을 많이 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면서도, 혼자 남게 되면 외로운 것보다 부끄러웠다. 폭넓은 인간관계가 그 사람의 능력인 양,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먼저 살갑게 다가가지는 않았고, 너무 많이 내 영역에 들어오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혼자 있는 시간이 부족하고,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고, 매일매일 시간이 부족해 끌리지 않는 인간관계를 맺는 데 쓰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조용한 퇴사를 했을 때, 조직 생활에 충실하지 않았을 때 잃는 것은 많다.
승진도 늦어질 수도 있고, 일만 많은 자리에 갈 수도 있으며, 외롭고 뒤쳐지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조용한 퇴사를 하지 않았어도 많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어려워 이러나저러나 힘들 바에는 내키지 않는 술자리는 절대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술자리에 낭비되는 시간과, 의지보다 더 많이 먹게 되는 술, 좋아하지도 않는 메뉴를 몸을 망쳐가며 먹어야 하는 일들이 낭비 중의 최고의 인생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키지 않는 술자리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거절의 기술이 필요했다. 변명거리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자동 반사적으로 예스맨이 되기 때문에 언제라도 거절할 수 있는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다행히 가족들이 있었기에 언제든 그런 제안을 거절할 수 있도록 연습해 두었다. 아이들 운동에 데려다줘야 한다든지(정말 데려다 주기는 해야 한다), 아이들이 아프다든지, 남편이 늦게 와서 빨리 집에 가야 된다든지, 엄마가 아프다든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내키지 않는 술자리를 거절하기 위해 변명들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
이렇게 몇 번 거절하다 보면 인간관계가 정리된다. 더 이상 술자리 제안을 받지 않아도 되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키지 않는 술자리는 가지 않아도 된다.
불필요한 약속이 없다 보니 운동할 시간, 공부할 시간, 독서할 시간이 확보되고 불필요한 인간관계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거절하는 기술을 배워보려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그런 기술은 없다는 결론이다. 거절을 안 한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좋아질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고, 거절을 한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나빠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남의 기분보다는 나의 기분에 충실하는 것이 더 낫다. 거절을 당해 기분이 나쁘면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내 상황이 안 돼서 거절을 하게 되어 그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면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렇다고 해도 거절이라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