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셔터 속 출구

by 내면여행자 은쇼

모든 것이 무너졌다.

"더 이상 출구는 없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그 말을 증명하려는 듯, 거대한 방화셔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쇳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차가운 강철. 저편의 세상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점점 좁아지는 틈 사이로 마지막 빛마저 사라졌다.


쿵. 방화셔터가 바닥에 닿았다.

벽이었다. 더 이상 길은 없었다. 나는 그저 벽 앞에 멈춰 섰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절망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기억하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낡은 제복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주름진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그의 손에는 너덜너덜한 노트 한 권이 들려있었다.


"사람들은 방화셔터가 내려오자 출구가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실은 그 옆에 비상구가 있었지. 그걸 몰랐기에, 그들은 벽 앞에서 멈춰섰고..."

노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나도 한때 이 벽 앞에 멈춰있었어. 그때의 나처럼, 넌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지."


노인이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엔 한 줄만이 적혀있었다.

'오늘, 나는 글로 길을 만들었다.'

글씨체가 나와 똑같았다. 페이지를 넘기자 수많은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듯한 오늘의 이야기가.


"이건... 제 필체예요."

"그래. 난 미래의 너야. 이제 알겠지? 벽 앞에서 멈추는 순간, 우리는 천천히 질식해가. 하지만 단 한 번의 글쓰기만으로도 길이 열릴 거야. 네가 쓰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새로운 길이 되는 순간을 보게 될 거야."


노인이 펜을 건넸다. 펜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첫 글자를 썼다. '나'. 방화셔터에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는'. 희미한 빛줄기가 글자를 따라 그려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글자들이 서로 이어지며 빛나는 선이 되었다. '나아간다.' 문장이 완성되자 벽을 가로지르는 빛의 지도가 그려졌다.


그제야 보였다. 방화셔터 곳곳에 누군가가 남긴 희미한 글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글자들이 모여 만든 EXIT라는 형광 글씨가.


손을 뻗어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놀랍게도 방화셔터는 종이문처럼 쉽게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자유의 공기였다.

"보이지? 네가 쓴 글자 하나하나가 길이 되었어. 모든 심리적 장벽에는 반드시 출구가 있어. 그 출구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지."


고개를 돌렸을 때 노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노트는 여전히 내 손에 남아있었다.

거울을 보니 이상하게도 더 이상 절망적이지 않았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먼 미래의 내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밤 한 편의 이야기를 쓴다.

그것이 나만의 길을 만드는 일이자, 누군가의 지도가 되어줄 테니까.


첫 문장을 쓸 때마다 나는 안다.

또 하나의 길이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가 쓰는 모든 문장이, 벽이라 믿었던 것들을 지도로 바꾸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지금 이 글이 누군가의 비상구가 되어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줄을 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빛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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