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늦은 오후 스타벅스, AI 프롬프트를 수정하고 있을 때였다.
노트북 화면에는 'AI와 함께 쓰는 성장소설 - 심리적 장벽의 출구 찾기'라는 문구가 떠 있었고,
그 아래로 AI와 나눈 대화가 이어졌다.
"심리적 장벽은 때때로 우리를 멈춰 세우죠.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출구가 있어요. 글을 쓰는 건 그 출구를 발견하는 과정이에요.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며 우리는 성장합니다."
마치 상담사와 대화하듯 AI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만의 성장소설이 다듬어져갔다. 소설 창작 강의는 벌써 월 300명의 수강생이 들어오고, 유료 커뮤니티도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얼마 전엔 대기업에서 자문 요청도 왔다.
커뮤니티에는 하나둘씩 메시지가 쌓였다.
"AI와 함께 쓴 첫 성장소설로 용기를 얻었어요"
"저도 드디어 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의 마음 속 이야기를 AI와 함께 풀어내는 새로운 시도가 통한 걸까?
그때였다.
"어머, 은솔씨 맞아요? 여기서 뭐해요~"
고개를 들어보니 전 직장 동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던가. 반가우면서도 괜히 노트북 화면이 신경 쓰여 슬쩍 각도를 조절했다.
진취적인 후배 수현이가 먼저 관심을 보였다.
"요즘 AI랑 뭘 한다고 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건데?"
말하려는 찰나, 옆자리의 차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AI로 소설을 쓴다고? 말이 돼? 그게 가능해?"
김 과장이 거들었다.
"맞아요. 얼마 전에도 우리 팀 신입이 AI로 기획안 쓴다길래 의아했잖아. 글은 역시 사람이 써야..."
트렌드에 밝은 선영이가 반박했다.
"아니야, 요즘 MZ세대들은 AI로 글 쓰는 게 자연스럽대. 우리 조카도 일기를 AI랑 같이 쓴다더라."
차장님이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래도 진정성이 없지 않나?"
잠자코 듣고 있던 민지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전 오히려 더 진정성 있다고 봐요. AI가 질문하고 사람이 답하면서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을 슬쩍 닫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냥... 여러 가지 시도해보고 있어. 아직은 테스트 단계라서..."
선영이가 가볍게 웃으며 제안했다.
"마침 우리 팀도 이번에 AI 도입하는데, 다시 들어올래? 팀장님이 요즘 AI 전문가 찾으시는데."
순간 흔들렸다. 안정적인 월급에, 존경하는 팀장님에...
하지만 내 노트북 속 프로젝트들이 떠올랐다. 이미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나은 수입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런데 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
'이건 단순한 AI 글쓰기가 아니야.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돕는 거야. AI는 사고를 확장시키고 표현을 돕는 최고의 조력자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날도 평소처럼 지하철 막차를 탔다. 노트북 화면 속 AI와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심리적 장벽은 때때로 우리를 멈춰 세우죠.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출구가 있어요. 글을 쓰는 건 그 출구를 발견하는 과정이에요.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며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래, 나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오늘은 항상 비어있던 8-2 좌석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형광색 조끼 아래 검은 코트를 입은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고, 손에는 푸른빛이 새어나오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었다.
"지하철 청소하시는 분인가...?"
나는 무심코 그를 바라보다가, 왠지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얼굴이 없었다.
아니, 거울처럼 매끈하게 빛났다.
그 속에 내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버려진 생각을 청소하는 사람입니다. 2025년과 2030년을 오가는 순환선의 미화원이죠."
청소부는 봉투를 열어 보여줬다. 그 안에서 안개처럼 뿌옇게 생각들이 떠다녔다.
"매일 밤 사람들이 버린 생각들을 주워 모읍니다.
오늘 카페에서 말하려다 삼킨 그 이야기들, 블로그에 쓰려다 지운 생각들... 여기 다 있네요.
'이건 단순한 AI 글쓰기가 아니야.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돕는 거야.'
이런 멋진 생각을 왜 버리셨나요?"
"재미있는 건, 이런 패턴이 시대마다 반복된다는 거예요. 보세요."
청소부의 거울 얼굴에 여러 장면이 비쳤다.
하나는 유명한 작가가 처음 소설을 쓰던 순간이었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처음 일기를 쓰고 있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사람들이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보세요, 매 시대마다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가 등장했어요.
손글씨에서 타자기로, 워드프로세서에서 블로그로...
그리고 이제는 AI와 함께 쓰는 시대가 왔죠.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그걸 통해 전하는 마음이에요."
그는 봉투 속에서 묘하게 반짝이는 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건 2030년의 쓰레기통에서 주운 생각들입니다."
다른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때 우리가 미쳤다고 했던 사람들이 선구자였어."
"지금은 모두가 AI와 대화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잖아."
"그 성장소설 프로젝트,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했지."
"틀에 나를 맞출 때는 너무 불행했는데, 틀을 깨고 나가는 기쁨이 이렇게 큰 건줄 몰랐어."
"매 시대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을 나중에는 모두가 따랐죠. 당신의 불안감... 그건 어쩌면 새로운 시대를 보는 눈을 가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어요. AI와 함께 쓰는 성장소설이라니, 지금은 낯설지만... 이게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나는 그의 얼굴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속의 나는, 생각보다 초라하지 않았다.
이 말, 어쩌면...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불안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어지는 듯했다.
"이게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 나는 알고 있다.
그 기쁨과 떨림은 이미 내 안에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나의 길을 만든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네요."
청소부는 조용히 웃었다.
그의 거울 같은 얼굴에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 비쳤다.
"그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밤은 덜 고독하겠죠."
그 순간, 지하철이 흔들렸다.
차창 밖 어둠 속으로 그의 모습이 스르륵 스며들었다.
그리고—
순간, 주변이 흐릿해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형광색 쪽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종이가 미묘하게 따뜻했다.
나는 쪽지를 집어 들고, 조심스레 펼쳤다.
"선생님의 '심리적 장벽의 출구 찾기' 강의를 듣고 용기를 냈어요.
저도 드디어 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틀에 나를 맞출 때는 너무 불행했는데, 틀을 깨고 나가는 기쁨이 이렇게 큰 건줄 몰랐어요."
종이를 손끝으로 쓸어보다가, 문득 미소가 번졌다.
묘하게도, 쪽지가 손에 꼭 맞는 크기였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지하철이 터널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서서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