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불받은 하루를 살고 있다
자유인이 된 후 느낄 수 있는 수많은 변화 중 가장 큰 것은 시간개념의 변화다. 이렇게 긴 하루가 사실은 모두 내 것이었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 시간이 많아지면 시간을 물 쓰듯 쓰게 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시간이 너무 아까워진다.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이 무엇인지 체에 거르듯 면밀하게 골라내게 된다.
덕분에 나는 몸과 맘을 더 많이 살필 수 있게 되었다. 회사를 다닐 땐 하루 최소 8시간 이상을 회사에 바치면서도, 퇴근 후 나를 위한 산책 한 번엔 그렇게 박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모든 일의 최우선 순위는 나의 컨디션이다. 정해둔 기상시간은 있지만 피곤하면 더 자고 밥시간이 안 됐어도 출출하면 먹는다. 이 컨디션을 잘 유지하지 못하면 일상 전체가 무너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내 몸의 감독관으로서 작은 변화에도 기민하게 대응한다. 말이야 거창하지만 그냥 내키는 대로 한다는 소리다. 삶이 아주 단순해진다.
자유인 첫 주에 느꼈던 행복이 아주 선명하다. 아침 산책 길이었는데 마치 여행을 온 느낌이었다. 이 시간에 걸으면 이런 온도구나, 이 정도의 햇살이구나, 이런 소음이 들리는구나를 온몸으로 느끼며, 아주 작은 감각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그 시간을 탐닉했다. 내가 그 장소에 있는 시간만 바뀌었을 뿐 매일같이 지나던 일상적인 장소였는데도 그랬다. 특별한 것 하나 없이도 행복감이 충만했다.
내가 벌어온 돈의 감춰진 얼굴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
원하는 시간에 산책을 나오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날 수 있는 것이 돈의 진짜 가치였음을 실감했다. 그 돈으로 나름대로의 기반을 다져왔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놓쳐왔을 것들이 새삼 아깝다 느껴졌다. 그동안 흘러간 시간들이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늦은 미련이자 욕심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여유롭게 쉬면서 빈 곳들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동안 머릿속의 것들을 빼내기만 했으니까, 밑천이 다 드러나기 전에 빨리 떠나서 채워놔야 다시 나아갈 동력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게 필요했던 것 같다. 비우니 평온하고 덜어내니 채워지는 느낌이다. 의미 있는 것들 사이에 있는 의미 없는 것들이 지금의 나에겐 더 중요하다.
흘러가는 시간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하고 싶던 일들을 갈무리해 본다. 의외로 특별할 게 없다. 도서관에 가기, 한적한 카페에서 책 읽기, 운동 다니기 정도랄까. 너무 평범해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도 다 해치울 수 있을 정도다.
얼핏 보면 회사를 다닐 때도 휴가만 쓰면 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일단 자유인과 직장인은 자세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직장인의 휴가는 생각보다 비장하다. 유한한 시간을 기어코 알차게 보내고 말리라는 결연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자유인의 마음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강물처럼 여유롭다. 이런 날은 그저 늘 있는 날들 중 하루일 뿐이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전혀 급하지 않다. 하고 싶던 일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인데, 그것들의 전제조건이 휴가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이젠 그 전제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밑도 끝도 없이 행복을 자주 느낀다. 마음이 지극히 평온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안정감에는 기한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지금의 풍요로운 마음은 금세 힘을 잃으리라는 것도. 필연적으로 끝은 오겠지만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현재를 최대한 즐기기로 했다.
오늘도 목적 없이 나가 이곳저곳을 부유할 생각이다. 나갈 시간도 돌아올 시간도 정하지 않았다.
아마 언젠가 이 시간을 포기하게 될 날도 오겠지.
그 끝이 온다면, 제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