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던 사자의 코털이 뽑혔다

조직 안에서의 치열했던 시간과 의문들

by 구자연

세상에 원래부터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집에서나 가족애를 믿고 설쳤을 뿐, 집 밖에서는 싸움이라는 걸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주변에 크게 모난 사람이 없던 덕분이기도 했고, 웬만한 것들은 서로 양보하면서 균형을 찾아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라는 곳은 아주 지독하다. 싸움 알러지가 있는 사람도 수십 수백 번 입술을 파르르 떨며 뜨거운 분노를 삼키게 만드는 곳이다. 신입 시절에야 아는 것도 배짱도 없어서 부당한 일을 겪어도 꿈틀하고 말았지만(그렇다. 꿈틀마저 안 하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 책상 밑에서 주먹만 부르르 떨던 애송이가 아니다. 잠자는 사자의 코 끝을 살랑이던 코털이 기어코, 회사라는 몹쓸 것에 의해 시원하게 뽑혔다. 내 안에 잠자던 사자가 눈을 떠버렸다.

싸움을 싫어하고 못 하는 사람도 사자가 될 수 있는 곳, 그곳은 회사라는 야생이다. 어쩌다 말싸움이라도 날 것 같으면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던 나는 이제 없다. 여전히 흥분하면 할 말이 목구멍에 한가득 차서 반의반도 내뱉지 못하지만, 더는 속절없이 물어 뜯기지만은 않는다. 사자가 된 애송이는 이젠 필요할 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런 내 모습을 두고 회사 친구가 말했다.

“너는 일할 때, 꼭 갑옷 입고 전장에 나가는 장수 같아.”라고.

그땐 푸하하 웃고 넘겼는데 그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치고는 꽤 비장한 마음으로 출근하고는 했으니까. 그래서 외부로부터 상처를 받을 것 같을 땐 일부러 이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갑옷에 모든 화살이 튕겨 나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단 한 발도 내 살갗에 박히지 않기를 바랐다. 사자의 기개와 갑옷으로 나를 지켰다.

회사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정말 싫었다. 편 가르는 사람들도 너무 싫었다. 같은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있는 곳이 회사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신념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날들이 많았다.

나는 여태 먼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지향해 왔지만 조직에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필요할 땐 목소리를 냈다. 일을 알아갈수록 그런 것들은 더 눈에 잘 들어오게 마련이고 누군가는 반드시 그렇게 목소리를 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순조롭게 해결되길 바라면서 기꺼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도 개선되지 않는 현실 위로 좌절감이 차곡차곡 쌓였다. 점점 나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에 화가 났고,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 되어 갔다. 내 안에 해소되지 못한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불현듯 의문이 찾아왔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지? 지금의 이게 정말 나인가?'

문득 바라본 내가 마치 돌연변이 외계생명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날 서 있고, 예민하고, 불안정하고, 조급해서 타인을 이해할 여유가 한 뼘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인간. 그걸 깨닫자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이 정도 되면 내가 문제인 게 아닐까?'

회사라는 조직이 문제인지, 이 회사가 문제인지, 내가 문제인지.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잘만 다니는 회사에서 왜 나만 못 견뎌 숨이 막히는 건지 궁금했다. 다들 나처럼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는 걸까, 한바탕 술로 털어버리는 걸까, 대체 어떻게 버티는 걸까. 근데 내가 이 조직의 문제적 인간이라면? 그렇다면 판이 완전히 뒤집힌다.

내가 떠나야 하는 거였구나.

오랜 시간 궁금했던 실마리가 비로소 풀리는 느낌이었다.

옳고 그름은 집단의 보편적 기준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질서에 녹아들지 못하고 나만 자꾸 겉도는 느낌이라면, 그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건방 떨지 말고 미련 없이 떠나는 쪽을 택해야 한다.

나는 내 상식과 신념이 공격받아 박살 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상대의 그것들을 깨부수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들은 실은 불필요한 잡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수가 다수를 거스르려 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보편적 질서를 거스르려 애쓰지 말자.

치열함의 옷을 벗었다.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던 갑옷을 내려놓자, 야생을 들쑤시고 다니던 사자도 다시 잠들었다. 나를 사방으로 감싸고 있던 화가 걷히자 원래의 내가 보였다.

아차차, 난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지.

마음이 다시 고요해졌다.

일단은 이 평화를 누리기로 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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