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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르릉 Nov 14. 2024

그만두기

20년 차 문화기획자의 폐업일기 01.  / 2024.02.24.

여느 때와 다름없는 2월이다.

사무실 책상은 적당히 채워져 있고,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분주하면서도 여유 있는 동료들, 그리고 이사회와 총회를 준비하는 나.


다른 게 있다면 결말과 결론을 정해놓은 한 해의 계획이 있다는 것.


그동안 우리에게 한해의 계획이란

가치 있는 일을 돈보다 우선 선택하는 것, 우리의 비전에 맞는 일을 선택하는 것, 돈도 안되고 엄청 힘든 일이지만 즐겁고 보람된 일이므로 더욱 잘하자는 것, 그리고 서로 잘 배려하고 성장하자는 것 정도였다.


돈을 얼마 벌겠다, 어떤 일로 회사의 가치를 더 높이겠다, 투자를 받겠다, 영업이익 얼마를 달성하겠다는 정량적이고 일반적인 회사의 목표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100년 회사는 되지 못한 채 그만두기로 했다.


모름지기 회사는 퇴사하고, 쉬고, 다시 입사하고, 커리어 업을 하고, 휴직을 하고 다 그런 거 같은데, 한국나이로 43살 먹은 나에게 그런 경험은 1도 없다.

혹은 대표(혹은 창업자)라면 창업하고, 폐업하고, 재창업하고, 재도전하고, 실패하고 뭐 그런다는데 그런 경험도 없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창업자도 아니고, 온전한 대표도 아닌 셈.


오래된 코어멤버들과 이사들이 있는 비영리 법인의 대표는 대표가 아닌 리더,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린다.


여하튼 회사라고 하기도 뭐 한, 단체이자 조직이자, 기획단이었던 우리는 최대 40명(본사, 위탁기관포함), 연 13억의 매출(본사만), 설립 20년이라는 정량적 결과를 남기고 그만두기로 했다.


폐업이라는 단어, 퇴사라는 단어는 애초에 회사라고 우리를 규정한 적 없기에 어색하고, 속상하기도 해서, 그만두기 정도라고 정했다.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는 우리 문서와 폴더의 이름은 "일단 멈춤"


앞으로 무엇을 하든 나의 정체성, 우리의 역량을 만들어 온 우리의 안알랴줌은 일단 멈추지만, 앞으로 뭘 하고 살든 우리의 마음속에 안팎에 넘실거리며 앞으로 우리의 일과 생활에서 묻어 나올 것이기 때문.


" 우리의 마음속에"라는 클리쉐는 다름 아닌 우리의 것이었다. 20대 초반에 만나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되고 함께 고생을 하고, 함께 기뻐하며 보냈던 그 시간 속에 회사 안알랴줌이 있었고 우리가 있었다.


그리고 애매한 단어 "우리". 안알랴줌 그 자체 이기도, 4명의 친구이기도 하고, 5명 혹은 7명의 코어멤버이기도 하고, 이사와 회원들을 포함하기도 하고, 마포라는 지역을 포함하기도 하고, 최고의 팀워크를 자랑하는 지금 우리 사무실 친구들이기도 한 '우리'


'우리'는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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