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길티 The Guilty>
자신은 청렴결백하다고 믿으면서, 타인을 향한 도덕적 잣대에는 매우 엄격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니 그야말로 이중적인 태도인 것이다. 누군가는 환경 보호를 외치면서 플라스틱 컵을 시시때때로 사용하고, 누군가는 혐오 반대를 외치면서 인터넷 댓글창에 소수자를 향한 비난과 혐오의 말을 쏟아낸다. 자신의 뒷담화는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가장 열심히 까내리기도 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사는 지도 모른다. 본래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말은 간단하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는 말은 언제나 공허하다.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고,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자신이 세워놓은 도덕적 잣대에서 되레 자기 자신은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엔 '환경을 보호해야 해' '혐오하지 않아야 해' '공정해야 해' '평등해야 해' 같은 말들이 쉽게 떠돌아다닌다. 공정과 평등을 외치면서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아내는 여느 정치인들의 말도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도 오늘 자기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 있다. 타인이 저지른 실수는 '실수를 가장한 악의적 행동'이고, 자신의 실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실수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의 악의적 행동이 사회의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찌 됐든,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삶에 모두 같은 잣대를 들이댈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이 쉬웠으면, 신문의 정치면이나 사회면이 이렇게 매일같이 시끄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엔 이중적인 사람으로 참으로 많고, 우린 우리의 눈으로 매일같이 그런 사람들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일을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조차, 사실은 매 순간이 이중적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아스게르', 정의에 꽤나 민감한 남자다. 이 영화는 정의에 목숨을 건 남자가 자신의 부도덕성과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러닝 타임은 1시간 28분이지만, 그 시간이 언제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몰입감이 굉장하다. 그가 왜 정의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가 추구하는 정의는 무엇인지, 그가 자기 자신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등을 살펴보며 어느새 나는 '나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당당할 수 있을 만큼 무결한 삶을 살았는가? 내가 추구하는 정의는 무엇이고, 나는 얼마나 그것을 충족시키며 살고 있는가? 영화 속 아스게르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선사한다. 시간이 날 때 이 영화를 한 번쯤 감상해보길 추천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