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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이 Mar 28. 2022

20분 일찍 일어납니다, 왜냐면요

#단어이야기

* 단어 '불편'에 대한 이야기


내가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회사의 출근 시간은 9시까지다. 기숙사가 위치한 지하철역에서 회사 역까지는 대략 30분 정도가 걸린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8시 8분에 오는 지하철을 탄다. '3호선 오금행' 8시 8분 차. 그러면 정확히 회사에는 45분쯤 도착하게 된다. 완벽했다. 지난주 목요일까지만 해도.


목요일 아침, 지하철이 연신내역에서 멈춰 섰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의 이동권 시위로 인해 당역에서 잠시 정차합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저희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오는 동안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크지는 않았지만, 가까이서는 들릴 만한 정도로. 그렇게 지하철은 멈춰 섰고, 사람들은 제각기의 자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앉지도 못한 채로 수많은 사람 사이에 끼어 서있는 일은 꽤나 고역이었다. 그렇게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지하철은 다시 출발했다. 그렇게   정거장 갔을까. 이번엔 '종로 3'에서 멈춰 섰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의 이동권 시위로..."


이번엔 그 시간이 더 길었다. 10분 정도 서있을까. 아마 그쯤 되었을 것이다. 출근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지하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하철이 움직일 기세가 없자 몇몇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내려 어디론가 뛰었다. 아마 버스나 택시, 여타의 이동수단을 택하기 위한 걸음이었을 것이다. 동기 언니에게 급하게 문자를 남겼다. 선배들이 찾으면, 시위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 말해달라면서.


그렇게 회사에 9시 10분경 도착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제시간에 맞춰 나왔는데도 지각을 한 것이 새삼 억울하기도 했다. 그렇게 결심했다. 다음 날은 한 타임 빠른 지하철을 타야지.




다음 날인 금요일에는 8시 1분 차를 탔다. 이날도 지하철이 잠시 멈춰 서기는 했지만, 어제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 회사에 8시 55분에 도착했다. 분명 늦진 않았지만, 시간이 조금 촉박했다.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괜스레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서 내내 뉴스를 보며 생각했다.


'직접 겪어보니, 꽤 불편하다.'라고.


그렇게 주말이 흐르고,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아예 더 빠른 차를 타자고 결심했다. 8시 1분보다 빠른 차는 7시 53분 차였다. 보통이라면 7시 20분에 일어나서 준비해도 충분할 터였지만, 7시 53분 차를 타기 위해선 늦어도 7시에 일어나야 했다. 아침의 10분, 20분이 얼마나 귀한지는 다들 말하지 않아도 알 테지만, 새벽 2-3시까지 공부를 하고 자는 나에게는 그 시간이 더욱 소중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8시가 넘어서 지하철을 타면, 또다시 지각할 게 뻔한데! (지각을 면하더라도 시간이 촉박한 게 너무 싫었다)




그렇게 7시 53분 차를 탔다. 오늘도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는 시위를 했고, 지하철은 역시나 멈춰 섰다. 그러나 20분 일찍 나온 덕에 회사에는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었다. 8시 40분, 커피를 사서 들어가기에도 충분한 시각이었다. 모닝커피를 사들고 회사에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좀 피곤하네'라는 생각.


장애를 가지고 있단 이유만으로 이동권이 제한되는 그들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권리 주장이 당장 내 삶에 영향을 끼쳤을 땐, '공감'보다 '불편'이란 감정이 앞섰다. 그래서 하루 종일 혼란스러웠다. 나 또한 그들이 그토록 소리치는 '강자'의 편에 서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약자'의 편에 서는 막연한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정치인들은 하루 종일 이에 대해 떠들어댔다. 누군가는 '그들의 시위가 다수의 삶에 피해를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에 중단되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그들이 왜 시위를 하는지 목소리를 들어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감히 어느 한쪽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삶에 공감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시위가 불편했고, 그들의 시위가 불편함과 동시에 그들의 행위에 공감했기 때문에.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들이 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다수의 출근길을 상대로 불편을 끼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는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단지 계속 생각할 뿐이다. 어느 한쪽으로부터 미움받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생각이 미움을 받을 만큼 확고하게 정리되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불편하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일 아침 또다시 20분 일찍 잠에서 깰 것이다. 20분 일찍 지하철에 탈 것이고, 멈춰 선 지하철 안에 서서 멍하니 지하철의 출발을 기다릴 것이다. 사람들의 불편에 공감하면서도, 지하철 시위를 지속하는 그들의 삶에 공감할 것이고, 나의 불편함을 말함과 동시에 그들의 불편함을 생각할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파악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것은 문제의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문제'가 뭘까. 나는 아직 그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대학생이다. 그러니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단지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해 20분 일찍 일어나기만 할 뿐. 나는 그저, 지각하는 것이 죽도록 싫은, 그런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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