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추억의 그림자

택시기사 수난 백서 - 6

by 장순영

“경마장으로 가주세요.”

“과천이지요?”“

네, 서둘러주시면 고맙겠네요.”

“알겠습니다.”


김 기사는 아직도 경마를 떠올릴 때마다 쓰린 아픔에 상을 찡그리곤 한다.

한때 경마에 빠졌다가 거의 곯을 대로 곯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2년이 더 지났건만 그때의 악몽 같던 상처를 좀처럼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맘 다져 먹고 개인택시 면허라도 따냈으니 망정이지, 그때 손을 떼지 못하고 끝까지 갔더라면 패가망신할 소지가 다분했다. 그래서 경마장이 있는 과천이나 장외발매소 쪽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특히 오늘 같은 주말에는 경마나 경륜 승객을 자주 태우게 된다. 그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지난날을 보는 것 같아 씁쓰레하게 입맛을 다시게 된다.

그런데 차에 오른 손님이 과천경마장을 가자고 한다. 마치 중증의 정신병자를 태우는 기분이다. 풍납동에서 탄 40대 초반의 남자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차가 잠실 롯데월드 앞을 막 지날 때 사내의 휴대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선글라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4 경주 끝났어?”라고 물으며 메모지를 펼쳐 든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낮게 말했지만, 무척이나 긴장되고 또 경직되어 보였다.


“어떻게 됐어? 2번 하고 8번 말이 들어왔지?”


그렇게 묻더니 그는 두 주먹을 말았다 펼치면서 환호를 내질렀다. 낮게 속삭이다가 갑작스레 내지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운전에만 열중하던 김 기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통화가 이어진다. 가만 들어보니 경마장에 먼저 간 일행과 통화하는 것 같았다.


“배당이 어떻게 돼? 여섯 배는 족히 넘지? 6.4배라고? 오백 다 박았지?”


사내의 연이은 질문에 김 기사가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아니, 혼란스럽다기보다는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전율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 옳았다.

오백이라면 5백만 원이다. 거기에 곱하기 6.4…. 어이쿠! 3,200만 원을 배당금으로 환급받는다. 한때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던 김 기사로서 그들의 대화가 어떤 내용인지는 쉽게 감 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내의 통화가 계속된다.

잘했어. 이젠 7 경주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8 경주 발매 즉시 지금까지 딴 돈 다 박아. 그래, 인마!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다 사란 말이야. 내가 천만 원 정도 더 마련해서 가는 중이니까 8 경주에 올인하자고. 이번에도 100프로 확실하다니까. 내가 얻은 소스가 한 번이라도 틀린 적 있었어?

그렇게 통화를 마친 사내는 시계를 보면서 “기사님! 좀 더 밟으시죠.”하고 채근했다.


“제대로 맞추셨나 보네요, 손님!”

“네? 아, 네에.”


김 기사가 말을 붙였지만, 선글라스는 짧게 답하고 다시 꼬깃꼬깃 접은 메모지를 펼쳐보는 것이었다. 김 기사는 눈치를 보다가 다시 말을 건넸다.


“8 경주에도 확실한 소스가 있나 봅니다.”

“기사님도 경마 좀 아세요?”


사내가 흘러내리는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며 고개를 쳐든다.


“하하, 한때 돈 좀 날렸습니다.”

“그리고 손 끊었군요.”


선글라스가 은근히 안 됐다는 듯 말을 받았고, 김 기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끊으셨어요. 경마든 경륜이든 끝까지 가면 망하면 법입니다.”


선글라스는 그렇게 툭 내뱉고 메모 쪽지에 무슨 숫자를 적어가며 계산에 열중했다.


“들어보니까 오늘이 바로 디데이인 모양입니다.”

“디데이요?”

“하하, 오늘 경주에 목숨 건 분처럼 보여서요.”

“하하하! 목숨이라. 맞습니다. 목숨을 걸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죠.”


김 기사는 그의 이어질 말을 더 들으려고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을 위해서 그간 공 좀 들였죠. 젠장, 그런데 돈 구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지 뭡니까. 다행히….”


선글라스의 사내는 다행히 오늘 얻어낸 두 경주의 소스 중 막 끝난 4 경주에서 3천만 원 정도를 불렸으므로 8 경주에서 어느 정도 배당만 유지돼준다면 양에 차진 않지만, 그럭저럭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사내는 시원하게 뚫리지 않는 길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손님! 8 경주라면 시간이 충분합니다.”

“아니죠. 표 사들일 시간이 넉넉하진 않아요.”


모르는 소리 그만하라는 식으로 선글라스가 말했고, 김 기사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환급받은 3,200만 원에 천만 원을 더 보태 마권을 구매하려면 걸리는 시간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다시 선글라스의 휴대전화기가 울린다.


“야, 뭘 자꾸 확인해. 8 경주엔 4번하고…”


선글라스 사내가 휴대전화기를 잔뜩 움켜쥐고 뒷말은 속삭이듯 말했다.


“볼 것 없어. 복송 말고 쌍승에 다 사. 7 경주 때까진 적당히 예매하고 8 경주 발매 즉시…, 알았지?”


사내의 통화에 귀를 기울이던 김 기사는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시간을 가늠했다. 보통 한 경주에 30분 정도의 간격이 있다. 이 정도 속도라면 경마장에 도착했을 때 8 경주 시작 전까지 3~40분 정도의 시간이 남는다.


“손님! 제 차 타신 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시고 저한테도 정보 좀 주시죠.”


사내가 통화를 마치자 김 기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탁하듯 말했다.


“8 경주는 거의 최저배당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돈 걸어봤자 시간만 허비해요.”


운전이나 열심히 해라. 다시는 한눈팔지 말고 성실하게 생업에나 종사해라. 그런 투였다. 김 기사는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오기가 돋았다.


“한두 세배 나올까요?”

“하하, 점잖으신 기사님께서 왜 이러실까.”

“지금, 싱숭생숭해서 운전이 안 될 정돕니다.”


사내가 메모를 펼치며 “가만있자…, 아무리 배당이 떨어져도 쌍승식 일곱 배는 족히 나오겠지요.”라며 이번엔 약간 자상하게 대꾸했다.


“그럼, 완전 저배당은 아닌데요.”

“…….”


사내는 엷은 미소만 흘릴 뿐 입을 다물었다. 완전 데끼리, 즉 최고 인기 마권만 아니라면 예닐곱 배는 훌쩍 넘을 수 있다. 더구나 1 착과 2착을 판별해내는 쌍승식이다.

예상지마다 모두 입상 예상 마로 잡힌 게 아니라면 10배 가까운 중 배당이 터질 확률도 높다.

한동안 경마장에 가지 않았지만, 그 정도 배당 움직임은 눈에 훤하다. 그건 불변의 법칙, 자연의 섭리다.

김 기사는 빠르게 머리가 회전했다. 이 손님을 태운 건 행운 중 행운일 수 있다. 가진 돈 3,200만 원에 지금 가지고 가는 돈, 천만 원을 모두 베팅할 정도라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진 게 틀림없다.


- 4번 말이라는 데까지 들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그것만 알아내면 횡재할 길이 열릴 수도 있다. 김 기사가 다시 졸랐다.


“손님! 좋은 일 한 번 하시죠.”

“네?”

“저도 오늘 저녁때 집에 고기 좀 사 들고 들어가게 해주십쇼. 부탁입니다.”

“하하하! 기사님! 배당 떨어질 일을 제가 왜….”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이요? 빨리만 도착하게 해주시면 제가 보답드리죠. 경주 시작 30분 전에만 도착하면 제가 요금의 따따블을 드릴게요. 하하하!”


선글라스가 표정도 감추고 이죽거렸지만 김 기사는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김 기사 자신이 마음이 다급해졌고, 가슴의 울렁거림은 참기 힘들 정도였다.


-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야.


차가 동작대교를 빠져나가 국립 현충원 앞에서 좌회전을 받았다. 남태령 고개에서 약간 정체되는 걸 고려해도 30분 이상의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은 네 곱절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양에 차지 않는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이미 환상에 빠져 헤어나기 힘든 상태까지 왔다.

김 기사는 이 손님이 1, 2착 마권만 알려주면 은행에 차를 세울 심산이었다. 엊그제 아들 녀석 대학 등록금을 위해 융자받은 돈이 그대로 통장에 들어있다.

잘만 되면. 잘만 된다면 다음 학기, 아니 그다음 학년 학비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손님! 저한테 조건을 말씀해주시죠. 제가 할 수 있는 한, 성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아저씨,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경마하셨다는 분이 경우 없이 소스 경주에 끼어드시면 안 되죠.”


사내가 정색을 하고 이마에 주름을 지었지만 김 기사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체면이고 뭐고 따질 계제가 아니다. 이미 사내한테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그의 휴대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6 경주까지 끝났어? 얼마나 샀어? 으음, 2천? 7 경주하는 동안에 나머지 다 사. 내가 도착하면 천 더 사야 하니까 서두르라고. 그래, 거기서 만나.”


통화를 마친 사내가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흰 봉투 몇 개를 꺼냈다가 다시 넣는다. 현금으로 천만 원. 아마 저 돈도 잠깐 사이에 몇 배로 불어날 것이다.

김 기사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뻔히 보이는 횡재를 놓치는 건 큰 손해다. 일확천금의 호기를 그냥 지나치면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이 아니다. 물욕이 자꾸만 마음을 조여 온다.


“손님! 제가 사례금으로 한 오십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허, 참! 이 아저씨가 정말.”


사내는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김 기사가 다급하게 제안을 수정한다.


“제가 백을 현금으로 드리겠습니다.”


김 기사는 아예 룸미러에 눈을 박고 사내와 눈을 맞추려 했다.


“됐어요.”


사내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리고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손님, 조금만 복구하게 해주십쇼.”

“하하하! 이 아저씨 정말 못 말리겠구먼. 도대체 얼마나 날렸는데 그래요.”

“집 한 채는 족히 날렸습니다.”

“뭘, 그 정도에….”


겨우 그 정도 잃고 무슨 엄살이 그리 심하냐는 뜻이겠지만 김 기사는 엄살이든, 사정이든 사내를 붙들고 늘어지기로 이미 작정했다. 어차피 오늘은 운전할 맛이 싹 가시고 말았다.


“기사님한테 알려주면 제 몫이 그만큼 줄어들잖아요.”


바라던 대응이다. 김 기사는 사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셈을 마친 주판알을 보여준다.


“백이면 최소한 육백은 더 붙이잖습니까?”

“…….”


김 기사의 재빠른 계산에 사내는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시트에 몸을 묻으며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베팅하실 건데 그래요?”


수정 제안한 비즈니스가 먹혀들 낌새가 보인다.


“가진 게 총 삼백입니다. 백 드리고 제가 이백 찔러봐야 배당 판은 까딱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한 번 선심 쓰십쇼.”

“그럼 딱 이백만 쏘는 겁니다.”


사내가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펼치면서 김 기사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렴요.”


룸미러 속 김 기사의 얼굴이 그제야 환하게 펴졌다.


4번과 11번.


- 1착 4번 말에, 2착은 11번 말이라….


김 기사는 빠른 걸음으로 박 사장을 따라가며 4번, 11번을 되뇌었다. 1번부터 14번 말까지 모두 14마리가 출전한다. 배당이 의외로 높게 확정될 가능성이 크다.

김 기사는 사당동 K 은행에서 총 5백만 원을 찾았다. 그중 100만 원의 현찰을 선글라스 박 사장에게 건네주었다. 차에 탔던 사내의 성이 박 씨라고 했으므로 김 기사는 그를 박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김 기사는 그에게 부를 수 있는 정겨운 호칭이 ‘사장님!’뿐이라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에게 2백만 원어치를 사겠다고 했지만 김 기사는 있는 돈 5백만 원을 몽땅 인출했다. 이 이상 확실한 투자는 다시없다. 박 사장에 의하면 오늘 벌어지는 4 경주와 8 경주를 엮기 위해 3천만 원 이상의 거금을 들여 작업해왔다고 한다.

예상지를 통해 4 경주와 8 경주의 2착 말들이 모두 같은 마방馬房에, 같은 조교, 같은 기수騎手임을 확인했다. 경마는 거의 확실한 우승마보다 그 뒤에 들어오는 2착 마를 찾는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부 조작. 말로만 듣고, 뉴스를 통해서나 접했던 경마의 승부 조작 주체를 직접 만났다.

그 주인공 박 사장이 차에 탄 건 우연이 아니다. 이건 필연이며,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그 축복을 최대한 만끽하리라. 김 기사는 총 4백만 원에 새벽부터 번 돈 10여만 원까지 모두 베팅하기로 했다.

4-11 마권에 영혼을 내맡기기로 한 것이다.


“복승도 필요 없어요, 무조건 쌍승으로 박아요. 혼자서 이백만 원어치 사려면 바쁠 겁니다. 빨리 갑시다.”


경마장으로 들어가면서 박 사장은 30분 남짓 남았다면서 거의 뛰다시피 했다. 돈 따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텐데 경마장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8 경주 발매가 시작되었지만, 다행히 발매 창구는 아직 붐비지 않았다. 8 경주 마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지와 배당 판을 번갈아 보면서 투자 금액과 투자 코스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4층 발매장, ‘4번-11번, 8.8배’.

발매 마감 28분 전, 예상 우승마 4번과 예상 준우승마 11번의 현재 배당이 8배에서 10배를 오가더니 현재 8.8의 배당을 가리키고 있다. 오로지 4번과 11번의 배당률만이 눈에 들어왔다.

김 기사는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막상 아들놈의 등록금을 찾아 마권을 사려고 하니 불안감이 몰려들기도 했지만, 이내 이 돈이 곧 확정된 배수만큼 불려서 되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여섯 배 이하로 떨어지진 않겠어.”


박 사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4번하고 11번… 틀림없겠죠?”


김 기사는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씻어내고자 재차 물었다.

그때 박 사장의 일행으로 보이는 회색 운동모자를 쓴 사내가 가죽 가방을 들고 박 사장에게 다가왔다. 회색 운동모자는 브이 자 모양으로 손가락을 펴 보이더니 양쪽 주머니에서 몇 다발의 마권 뭉치를 꺼내 박 사장에게 보였다.


“다 박았어?”

“응, 4, 11에 몽땅.”


김 기사는 맨 위의 10만 원짜리 마권에 4번과 11번이 선명하게 찍힌 걸 보았다. 그걸 보자 김 기사는 잔설처럼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자, 이거 500만 원이야. 나머진 내가 살 테니까 빨리 서두르자고.”


그렇게 자기가 가진 흰 봉투 몇 개를 일행인 회색 운동모에 건네준 박 사장이 김 기사를 보고 “됐습니까?”라며 더 확인할 게 있느냐는 투로 말했다. 김 기사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사님도 서둘지 않으면 몇 장 못 사겠는데요.”


김 기사는 한 움큼의 구매표를 빼 들고 발매 창구 앞으로 다가가며 쌍승식 4번 란과 11번 란을 까맣게 칠했다.

한 장당 10만 원짜리 구매표. 4백만 원, 아니 4백10만 원어치를 사려면 총 마흔한 장을 사야 한다.


“다 사시면 1층으로 내려오세요. 8 경주는 같이 구경해야죠.”


짜릿한 희열을 함께 누리자는 박 사장의 환한 웃음이 정겹고 고마웠다.


두 주먹을 불끈 쥔 김 기사의 양손에 흥건하게 땀이 찼다. 누가 보더라도 4번 말이 우승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예상지마다 모두 별 표시를 해놓았다.

1,800m 경주코스 중 결승선 500여 m를 남겨놓고 치고 나온 4번 말, ‘라이더스’는 이미 후미 그룹과 50m 이상을 벌려놓고 독주 중이다.

이제 추입마追入馬인 11번, ‘터미네이터’만 코너를 돌면서 모습을 보이면 8.5배의 확정배당금을 타게 된다. 간신히 4백10만 원어치의 마권을 모두 살 수 있었다. 총액 3,485만 원.

은행에서 찾은 5백만 원과 오늘 수입 10만 원의 본전을 제하면 정확히 2,975만 원을 버는 셈이다.

처음 예상했던 배당보다 다소 높아 불안한 일면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많은 돈을 베팅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 아, 나는 다시 경마꾼으로 돌아온 것인가.


‘터미네이터’는 여섯 마리 정도의 2진 그룹에 끼여 호시탐탐 가속을 올릴 때를 노리고 있다.

추입마다. 초반부터 속도를 올리는 도주마나 선행마와 달리 최종 100~200m를 남겨두고 남은 힘을 쏟아부어 최고 속도를 올리는 레이스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상 없겠죠? 박 사장님!”

“이미 다 끝난 경주예요. 3착보다 2 마신 이상 앞서서 들어올 겁니다. 난, 창구 앞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렵니다. 환급받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릴걸요.”


하하하! 박 사장의 웃음소리가 경쾌했다. 회색 운동모자에게 “야! 그 가방 너무 작은 거 아냐?”라고 말하며 실내로 들어가는 박 사장의 들뜬 목소리. 그러나 김 기사는 최종 골인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쩌면 평생 눈앞에서 가물거릴 명장면이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 200m. 아직 ‘터미네이터’는 나란히 2착 그룹 말들 틈에서 밀리지도, 나서지도 않고 있다. 150m, 100m, 80m….


- 터미네이터! 이젠 치고 나올 때야.


김 기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7번 마의 머리가 삐져나오며 선두로 나섰다. 7번 마에 바짝 붙은 건 11번 ‘터미네이터’가 아닌 3번마다. 이미 4번 ‘라이더스’는 1착으로 골인해 우승을 확정 지었다.


- 채찍을 더쳐.


김 기사는 속으로 기수를 채근했다.


“야, 이 자식아! 더 세게 치란 말이야.”


김 기사는 결승선 50m를 남겨놓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다시 30m를 남겨놓았을 때 김 기사는 다리가 풀리고 하늘이 노래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2착 3번, 3착 7번.

여섯 마리의 2진 그룹 중 11번 ‘터미네이터’는 추입마라는 경주 스타일이 무색하리만치 골인 지점 앞에서 급격하게 속도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맨 후미 그룹에서 달려오던 말들한테도 추월당해 등외로 밀리고 말았다.


김 기사는 다시 1층부터 4층까지 훑었지만, 박 사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썩을 놈, 소스라고? 11번 말이 무조건 2착이라고?”

“만나기만 해 봐라.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거야.”


김 기사가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터덕터덕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개인택시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두 사람의 푸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저씨들도 누구한텐가 11번이 들어온다고 들었나요?”


흙빛이 된 김 기사의 몰골을 훑어본 그들 중 한 사람이 묻는다.


“댁도 11번에 박았수?”

“…네.”

“혹시 댁도 개인택시… 기사 아니쇼?”

“…….”

“흐흐! 이 양반도 그놈들 제물이시구먼. 댁은 얼마에 소스를 사셨소?”

“네?”


김 기사는 더더욱 얼이 나가고 말았다.

김 기사는 주말과 일요일이면 그때 만난 두 명의 개인택시 기사와 교대로 경마장 보초를 섰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근 두 달 동안 박 사장, 아니 기생충 같은 놈을 찾아 헤맸지만, 놈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집 한 채를 날렸던 옛 추억의 그림자만 암울하게 자리 잡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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