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 수난 백서 - 7
은행을 다녀온 털보가 “받고 백 더.”라며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돈을 밀어 넣었다. 조급해하고 있다.
털보는 제일 먼저 올인되고 돈을 찾으러 은행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상한 자존심이 흥분으로 이어졌다. 기껏해야 플러시 메이드일 게 뻔하다.
이 기사는 되감아 레이스를 부르려다 히든을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서 감았다간 손님만 놓친다. 레이스로 되받아친들 어차피 박 장로도 받을 돈이 없다.
히든카드가 돌려졌다. 이 기사는 한 장이 붙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제스처로 보이게끔 마지막 카드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신중하게 펼쳤다.
10 스페이드, 이 얼마나 고마운 패인가. 굳이 경계해야 한다면 김 기사의 10 타이틀이나 J 타이틀 정도였는데 둘 다 물 건너갔다. 이미 박 장로한테 J 한 장이 더 떨어져 J 원 페어로 액면 상 보스가 된 상태이다.
이 기사의 눈은 자신의 카드보다 다른 세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이들은 조금만 세세히 보면 받은 패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포커페이스란 게 없다. 특히 김 기사는 술까지 마셔서 손에 쥔 패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게임을 끌어가고 있는 편이지만 그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어쩜, 이번 판에….
이번 판에도 김 기사가 특유의 객기로 판을 휘어잡으려 한다면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는 8, 10, J를 펼쳐놓고 있다. 기껏해야 7, 8, 9, 10, J의 스트레이트일 공산이 크다. 최고의 패를 쥐었다 해도 8 타이틀이 고작이다. 딱 밟힐 패다.
박 장로는 플러시로 메이드 된 것 같다. 설사 그의 패가 최고 메이드가 된들 별로 신경 쓸 게 없다. 그는 이미 실탄이 떨어져서 치고 나갈 수도 없는 반쪽 패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털보, 겨우 3, 7, 8의 각 패를 펼쳐놓고 5구째부터 치고 나왔다. 그 역시 스트레이트가 메이드 되었거나 3 트리플이나 7 트리플에서 타이틀로 메이드 되기를 바라는 게 분명하다.
이 기사는 히든에서라도 털보한테 날개가 달려주기를 기대했다. 그래야만 제대로 판을 키운다.
보스인 박 장로가 어쩔 수 없이 체크를 했고, 그다음 털보가 수북이 쌓인 판돈만큼 베팅했다.
기회가 온 걸까. 이 기사는 한 점 바람이 싸하게 몰려오다가 갑자기 따끈한 온기로 와닿는 걸 의식했다.
“레이스!”
이 기사가 치고 나가겠다는 의사를 언급하고 베팅 한도액만큼 더 밀어 넣었다. 판돈이 800만 원 정도로 불었다.
김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레이스를 외치고 추가 베팅을 했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싶었는데 다시 털보가 레이스를 부른다.
이 기사는 황홀한 기분에 젖었다가 두 사람의 패를 다시 가늠했다. 그러나 아무리 높게 봐줘도 9 타이틀을 누를 패로는 읽히지 않는다.
조 기사, 털보가 한 번 더 판을 키우자 나머지 사람들이 콜만 부르며 따라가더라도 판돈 전체가 이번 판에 몰리는 셈이다. 이 판의 위너 winner가 싹쓸이를 하게 된다.
박 장로가 사이드, 김 기사가 올인, 이 기사 역시 가진 돈을 다 밀어 넣으며 콜.
이 기사는 자신이 예견한 패와 별반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역시 박 장로는 플러시. 털보와 빨간 양말도 박 장로의 패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둘 다 박 장로보다는 높다는 뜻.
김 기사가 8 세 장에 6 두 장을 펼치며 털보와 이 기사의 눈치를 살핀다.
- 역시…. 내 생각대로야. 후후!
이 기사는 절로 나오려는 회심의 미소를 가까스로 억제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나머지 한 사람, 털보의 바닥 패 중 7 한 잠을 자신 이 들고 있었으므로 역시 털보는 3 타이틀이다.
이 기사는 자신이 쥐고 있던 카드 네 장을 비교적 차분하게 내려놓았다. 이럴 때일수록 판돈만 쓸어 담는 거다. 상대방의 기분을 더 망가뜨릴 필요가 없다.
“나인 타이틀입니다.”
이 기사는 털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표정이 또다시 일그러졌을 것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려 했다.
“제대로 한 번 떠줬군.”
아주 잠깐이었을 텐데 털보에게서 많은 변화가 스쳐 지나간 것 같다.
“자네한테 또 졌네.” 이 기사는 털보의 말을 그렇게 체념의 의미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판으로 손이 가려는데 그의 패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아, 이럴 수가….
3 넉 장, 7 두 장. 3 타이틀에서 치고 나온 패가 마지막에 3 포커로 신분 상승을 한 것이다.
“나한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먼.”
3 타이틀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거든. 판돈을 긁으며 털보가 웅얼거렸는데, 이 기사는 망치에 머리통을 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김 기사도 그제야 술이 깼는지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젠장, 죽 쒀서…”
“오늘은 여기 까지지?”
털보가 세 사람을 둘러보며 의사를 타진했다.
“무슨 소립니까? 돈 잃고 속 좋은 사람 봤어요? 나도 은행 좀 다녀올게요.”
김 기사가 기다리라면서 일어섰고, 멍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이 기사가 김 기사를 따라나섰다.
이 기사는 그 이후로도 세 차례나 은행을 더 다녀와 숱하게 테이블 머니를 올려놓았으나 꺾인 기를 살리지 못했다.
털보와 김 기사의 소나기 같은 레이스에 끼어 이 기사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허덕거려야 했다. 그렇게 단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3천만 원을 잃었다.
이틀 후. 이번엔 1차 테이블 머니가 각각 천만 원씩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이 기사는 자신의 교만을 자책하며 이틀간 이를 갈았다.
- 너무 방심했어.
범이 토끼를 잡을 때도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고 하지 않던가. 이 기사는 오늘은 더더욱 신중하고 냉정하게 게임에 임할 것을 다짐했다.
오늘도 올인이 된다면 보통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 밥벌이 수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2천만 원? 차를 담보로 잡히겠다구?”
이 기사는 실탄을 구해야 했다. 그래서 개인택시를 몰다가 면허를 처분하고 사채업을 시작한 선배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야? 얼마나 급한 일이 생겼기에 생명줄 같은 차를 맡긴다는 거야?”
“딴 얘기 말고 2천만 건네줘요. 못 갚으면 형님 맘대로 하시고요.”
감당키 어려운 고리의 이자를 감수하고 직업을 맡긴 셈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딱 하루치 이자만 부담하고 차를 찾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얕잡아본 거야. 그날은 예기치 않은 날벼락을 맞았어. 그래서 흔들렸어. 그러나 오늘만큼은.
당신들은 여전히 호구야. 이 기사는 카드를 받으며 털보를 쏘아봤다. 그날의 최종 승자. 단 한 푼의 개평도 없이 게임이 끝났다.
털보가 선심을 쓰려했으나 김 기사가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조 기사님만 단맛 보고 끝내면 불공평하죠.”
이튿날 다시 모이자는 김 기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틀 후로 다시 복수전을 벌이기로 했다. 깨끗이 승복해야 자신이 승자가 되었을 때 승자의 희열에 흠뻑 젖을 수 있다.
모두의 생각이 그러했으므로 판의 뒤끝은 그날도 깔끔했다.
한 시간 경과. 비교적 지루하게 작은 판이 오가자 김 기사는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웃기는 친구다. 그저께도 술만 아니었다면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그다.
이런 큰 판에서 술을 마시며 스스로 패배를 자초한다는 게 한심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이 기사 자신은 정작 생계수단을 담보로 돈을 빌려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 그래, 술맛이 얼마나 쓴지 이번 판에 알게 해 주마.
이 기사는 6구에 K 타이틀이 떴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메이드가 될 때마다 매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의식하게 된다. 판이 커지길 기대하며 보스인 털보의 눈치를 살폈다.
“이백에 육백 더.”
털보가 이백을 베팅하자 박 장로가 콜을 했고 이 기사는 총 8백만 원을 판에 밀어 넣었다.
“이백에 육백에 천이백 더.”
김 기사의 입에서 맥주 거품이 튀었다. 역시 고맙게도 김 기사가 판을 키워준다.
“레이스!”
털보의 되치기. 이 기사는 털보의 카드를 다시 점검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바닥 패를 점검했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봐도 아직 털보는 별 볼 일 없다.
박 장로가 가기 싫은 물가에 끌려가는 망아지처럼 콜. 박 장로의 패를 볼 겨를도 없이 이 기사도 따라서 콜을 불렀는데, 김 기사는 미친 듯 레이스를 외치더니 가진 돈 모두를 판에 집어넣는다.
이 기사는 그의 양말이 유난히 빨갛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기사는 갑자기 커져 버린 판에 어안이 벙벙했으나 빠르게 상대의 패를 읽었다.
깔린 패로 보아 10 타이틀이 분명하다. 혹시 포커를 따져보았으나 김 기사한테 쥔 카드로 포커나 그 이상의 패는 있을 수 없다.
이 정도 판돈만 먹어도 엊그제 잃은 본전은 찾게 된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불행한 사태를 대비해 불씨는 남겨둬야 했기에 콜만 불렀는데 털보가 죽기 살기로 레이스를 외치는 게 아닌가.
- 도대체….
털보가 가진 돈 모두를 베팅했고 박 장로가 흙빛이 되었다가 콜을 부르며 역시 올인. 김 기사가 고개를 꺾는다. 괜한 객기 부린 걸 후회하는 표정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기사는 앞에 쌓인 돈 모두를 밀어 넣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다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진정 무서운 적은 엉뚱한 곳에서 숨죽이며 있었던 게 아닐까. 너무나 조용해서,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사람. 이미 판에서 빠진 것만 같았던 박 장로. 그의 패를 소홀히 여겼다는 게 느닷없이 불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김 기사가 10 타이틀을 펼치자 털보가 아예 자신의 패를 덮어버린다.
“포커 잡았으면 드시게.”
박 장로의 바닥 패, 에이스 A 한 장이 마치 흡혈귀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의 말이 송곳니처럼 이 기사의 목에 박힌다.
아아, 불행은 예견한 대로 찾아온다더니. 딱 한 끗 차이. 모처럼 잡은 K 타이틀이 또 에이스 타이틀에 짓밟히고 만다.
이 기사가 다시 천만 원을 테이블 머니로 올렸을 때는 모든 기가 빠져나간 뒤였다. 판세를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이 기사는 심하게 흔들렸고 그 돈을 판에 모두 보태고 손을 털기까지는 겨우 한 시간도 더 걸리지 않았다.
세상이 암흑처럼 어두워졌고, 산소가 부족해 숨쉬기가 버거웠다.
육개장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운 장 기사는 이쑤시개를 물고 신문을 펼쳐 들었다.
“이번 총선엔 제대로 된 사람들이 뽑혀야 할 텐데….”
노란 유니폼을 걸친 장 기사는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이번엔 종교단체도 당을 만들었더구먼요.”
“종교가 정치에 맛을 들이면 안 되는데.”
옆자리에서 막 식사를 마친 한 사람이 말했고, 마주 앉은 초로의 기사가 하얗게 센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걱정스러운 듯 말을 받았다.
다시 상대가 “밥 먹고 나니까 나른한 게 일 나가기 싫네요.”라고 하자 초로의 기사가 “둘이 맞고 한 번 어때?”하고 응수한다.
식당 주인 이 웃으며 “하하하. 방에 들어가서 두 분이 피 튀기게 붙어보시죠.”라며 방을 가리킨다.
“그래도 셋은 돼야 재미나지.”
마치 연극 대본처럼 장 기사가 보던 신문을 접고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었다.
“초면에 제가 두 분 돈 좀 따면 안 될까요?”
그러자 한쪽에서 잠자코 TV를 보던 뾰족 턱의 기사가 “그럼 저는 광 좀 팔 수 있을까요.”라며 다가왔다.
“하하! 다들 개인택시 기사님이시다 보니 쉽게 어우러지시는군요.”
주인이 방을 안내하고 자리를 마련해주자 네 사람이 인사를 나누었다.
“전, 조 기사고요.”
“나도 개인택시 모는 박 가라오.”
털보와 흰머리의 인사를 받은 뾰족 턱이 “나는 김 기삽니다. 일명 빨간 양말로 통하죠, 하하하!”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호탕하게 웃는다.
“거기, 기사님은?”
털보 기사가 묻자 장 기사가 유니폼을 벗으며 씩 웃었다.
“아, 저요? 그냥 짭새라고 불러주시지요.”
“짭새요? 그게 닉네임입니까?”
“하하하! 직업입니다.”
순간 세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머리가 하얀 박 기사가 슬금슬금 자리를 뜨려 했다.
“이봐요. 도망갈 데가 없어요.”
“…….”
“저 사람들 뚫고 도망가다가 뼈라도 부러지면 난 책임 못 집니다.”
이미 기사 식당의 홀에서 주인한테 수갑을 채운 형사가 세 사람에게 순순히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강동경찰서 강력팀의 장 형사가 삼인성호三人成虎의 고사를 들먹이며 사태를 설명할 때까지도 이 기사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교회 장로라던데….”
“사기도박으로 여섯 번이나 교도소를 들락거린 사람한테 장로를 맡기는 교회도 있답니까?”
“다른 두 놈은요?”
“다 똑같은 놈들이에요. 감방 동기들이 작당해서 개인택시 기사인 척하고 개인택시 기사들을 호구로 삼은 거죠. 기사 식당 주인도 한패고요.”
장 형사는 서랍에서 카드 한 목을 꺼내더니 마치 패를 돌리듯 카드를 네 개로 배분한다. 영문을 모르는 이 기사가 장 형사와 나눠진 카드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쪽 패를 펼쳐 봐요.”
이 기사가 펼치자 K 타이틀. 그다음 카드를 펼치자 A 타이틀이다.
“이게 소위 탄이라는 거예요. 놈들은 미리 엮어놓은 탄 카드로 당신을 벗겨 먹은 거라고요.”
한참을 멍하게 앉았다가 이 기사가 물었다.
“그럼, 내 돈은요?”
“지금 돈 찾을 형편이라고 생각해요?”
“…….”
이 기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일단 귀가하세요. 저 사람들 조사 끝나면 연락드릴게요.”
장 형사는 마지막 피해자, 이 기사의 축 처진 모습을 보자 무척 안쓰러웠다.
세 사람이 짜면 거리에 범이 나왔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다는 뜻의 삼인성호와 비유하기엔 세 사람의 피의자는 너무 악랄하다.
세 놈의 악귀들에게 차까지 잃고 생계를 걱정하는 그의 탄식이 입맛을 씁쓸하게 한다.
세 놈이 한 사람을 호구 삼아 울부짖게 만들었다. 신실한 크리스천인 장 형사는 일단 장로라 칭하며 양의 행세를 한 늑대 두목을 불러 조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사기도박 전과 6범의 박두만은 “장 형사님! 잘 부탁드립니다, 헤헤!”하며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살살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