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성호三人成虎(2-1)

택시기사 수난 백서 - 7

by 장순영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히든에 8 타이틀이 떴네요.”

“…….”

“이 친구 이거, 순 타짜 아냐?”


5 타이틀을 잡고 레이스를 외치며 판을 끌어온 빨간 양말 김 기사가 주눅이 든 반면, 6구에 카드를 접은 털보 조 기사가 오히려 툴툴거렸다.

연속 네 판째 판돈을 긁은 이 기사가 희희낙락하며 쓸어온 돈을 정리했다.


“오늘은 그만합시다. 총알이 바닥났어.”

달랑달랑 명맥을 이어오던 백발의 박 기사가 이번 판에서 올인 all-in이 되자 군말 없이 먼저 일어섰다.

“박 장로님! 제가 총알을 빌려드릴 테니까 조금 더 놀다 일어나시죠.”

이 기사는 혼자만 독식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한참 불붙은 레이스 퍼레이드가 식어버릴 것 같아 박 기사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됐네요. 내가 아무리 돈을 잃었어도 빌려서까지 해본 적은 없어.”

“역시 장로님다우십니다.”

장로라고 불리는 박 기사의 말에 턱수염이 수북한 조 기사가 엄지를 피며 치켜세웠다.

“그래, 오늘은 나도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하니까 이 정도에서 끝내자고.”

“그 대신 내일은 제대로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때?”

“제대로요?”

“응, 좀 세게 말이야.”

박 기사가 웃옷을 걸치며 제안했다.

“하하하! 교회 헌금함이라도 통째 가져오시려우?”

털보 조 기사가 특유의 너털웃음을 날리며 빈정거린다.

“농담 말고. 계속 잃기만 하니까 본전 생각나서 그래. 크게 한판 벌리겠다면 나도 제대로 준비할 테니까.”

“얼마나 크게 키우시려고 그러는 건데요?”


이번 판에 제법 크게 멍들어 표정이 굳은 김 기사가 벗어놓았던 빨간 양말을 신으며 퉁명스레 물었다.


“올인되면 속이 뒤집힐 만큼. 어때?”

“한 바퀴 테이블 머니에 백?”

“조 기사는 그 정도에 속까지 뒤집히나? 얼굴은 큼지막한 사람이 쫀쫀하긴.”

“허허, 장로님이 완전히 사람 속을 뒤집으면서 판을 키우시려고 하네.”

“오백씩 어때?”

“…….”


이 기사는 침을 삼키고 그들의 결론을 기다렸다. 아니 털보와 빨간 양말이 어느 교회인가의 장로 직분을 맡고 있다는 박 기사의 제안에 동의하기를 기대했다.

“난, 콜!”


빨간 양말이 제일 먼저 오케이를 했다.

“이 기사는 어때?”

“너무 세지 않나요?”

이 기사가 슬쩍 꼬리를 내린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대대익선大大益善. 많을수록 좋고, 클수록 좋다.

포커를 즐기는 이 기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러나 호구들에 대한 예우이자 필수 동작, 엄살을 시의적절하게 보여줬다.

“할 사람만 합시다. 나도 동의합니다.”

털보가 중간에 나서서 장로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우리 셋이서 코피 터지게 붙어보자고. 내일, 바로 여기서.”


장로가 결론을 내린다. 그러자 이 기사가 “돈은 나 혼자 땄는데 내가 빠지면 세 분이 내 욕을 하실 거 아닙니까?”라며 응수했다.

“하하, 가만히 보니까 이 양반 단수가 보통이 아니야.”

“사실 욕심 좀 나네요, 하하하!”

이 기사의 동조로 네 사람 모두 내일 일대 결전을 벌이는 데 합의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헤어집시다. 갑자기 자잘한 판이 싫어지네요.”

“오늘도 나만 쪽박 찼군.”

“꿈 잘 꾸면 내일 일시에 회복할 수도 있지. 김 기사 실력으로는 꿈 잘 꿔도 달라질 게 없겠지만.”

“염장을 질러요.”

“자, 그럼 내일 총알들 충분히 준비해서 만나자고.”

박 기사가 먼저 차를 출발시켰고, 이 기사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차를 뺐다.



이 기사가 그들 세 사람과 어울리게 된 건 불과 보름 전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점심을 먹으려고 들렀던 천호동의 기사 식당에서였다. 옆자리의 두 기사가 막 식사를 마치고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밥 먹고 나니까 나른한 게 일 나가기 싫구먼요.”

“나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더 피곤해.”


머리가 하얗게 센 기사는 후덕하게 생겼는데 목소리도 점잖고 교양이 넘쳐 보였다. 다른 일행은 그보다 약간 젊어 보였지만 턱수염을 길렀고 몸이 뚱뚱했다.

두 테이블 건너 다른 한 사람이 혼자 식사를 마치고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그도 개인택시 기사처럼 보였다.

“오늘 같은 날은 여기 눌러앉아 고스톱이나 쳤으면 딱 맞겠구먼.”

“둘이 맞고 한 번 칠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식당 주인이 웃으며 다가가 “하하하. 방에 들어가서 좀 쉬었다 가세요. 맞고도 칠만하더라고요.”라며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이다.

“그래도 셋은 돼야 재미나지.”

“주인 양반이 같이 끼지.”

“전, 일해야죠. 방은 얼마든지 빌려드리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식당 주인이 고개를 돌려 이 기사와 다른 기사를 가리키며 두 사람한테 눈짓하는 것이다.

이 기사는 은근히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날이 더워지자 좀 쉬고 싶은 생각이 드는 중이었다.

“아무렴요. 고스톱은 세 명이 정원 아닙니까.”

이 기사는 넉살 좋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신문을 보던 뾰족 턱의 기사가 “광까지 팔 수 있으면 더 좋죠.”라며 다가왔다. 주인이 방을 가리키며 웃었다.

“하하! 금세 멤버가 만들어졌네요. 저 방에 가셔서 편하게들 노시다 가세요.”

“전, 조가요, 이 분은 박 기사님이고요. 교회 장로님이신데 세상 재미 다 보면서 하나님을 섬기신다네요. 하하하!”

털보 조 기사가 자신과 박 기사를 소개하자 이 기사와 뾰족 턱 김 기사가 수인사를 나눴다.

뾰족 턱은 그날도 빨간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그는 빨간 양말을 신은 후로 무사고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발등을 두드렸다.

“고스톱보다 훌라가 더 재밌지 않을까요.”

주인이 화투와 카드를 한 목씩 들고 들어오자 빨간 양말이 카드를 쥐고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 기사는 빨간 장갑의 제안에 손뼉까지 쳤다.

훌라든, 세븐 오디든, 바둑이든 역시 카드라야 시간 보내는 맛이 난다. 고스톱은 지루하다. 재미 삼아 치는 거지만 그래도 날린 시간만큼 따서 보충해야 한다.

그렇게 한 시간쯤 훌라로 시간을 보내다가 또 빨간 장갑의 의견에 따라 세븐 오디로 종목이 바뀌었다. 이 기사는 세 사람 모두 훌라뿐 아니라 세븐 오디도 형편없는 실력인 걸 파악하고 느긋하게 판을 주도해 나갔다.

우연하게 일행이 된 네 사람은 그날 이후 사흘에 한 번씩 그 기사 식당에서 모였고, 그때마다 이 기사가 주로 판쓸이를 했다. 너무나 실력 차이가 나서 한두 번은 적당히 딴 돈을 풀어주기도 하면서 세 사람을 데리고 놀다시피 했다.

오늘도 이 기사 혼자 일방적 레이스를 펼쳐 50여만 원을 챙겼지만, 누구 하나 추잡하게 개평 운운하지 않는다.

셋 모두 매너가 좋고 뒤끝이 깔끔해서 이 기사는 자신의 취향에 딱 맞는 사람들이라며 그들과 어울리는데 한참 재미를 붙인 상태였고, 최근 들어 천호동으로 출근하는 날을 기다리는 맛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박 기사를 보니 은근히 열을 받은 것 같다. 교회 장로 신분에 돈 잃고 속상한 걸 후배 기사들한테 내보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기사는 박 장로의 본전 욕심으로 인해 은근히 기대했던 판 갈이가 앞당겨지자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 한 사람당 오백이라고?

대단한 업그레이드다. 바로 내일, 평소보다 이틀을 당겨 대형 보너스까지 타게 된다. 지금까지 딴 돈이랍시고 다해봐야 고작 300만 원 남짓하다.

대여섯 차례 돈을 따면서 즐기기는 했지만 지루함이 없지 않았다. 이 기사는 사우나 앞에 차를 세웠다.

내일을 위해 목욕재계를 할 참이다. 무엇보다 몇 푼 더 벌고자 거리를 헤매고 싶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생활수단으로 개인택시를 모는 것 같지는 않았다. 뜨끈한 열탕에 푹, 몸을 담근 이 기사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털보 조 기사에 의하면, 박 장로는 한때 중견 주택건설업체를 운영하다가 아들한테 사업을 물려주고 정작 자신은 선교를 위해 운전을 한다고 했다. 개인택시 기사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아직 일선에서 완전히 은퇴하기엔 체력이 창창한 초로의 기사 중에 그런 이들이 많은 편인데, 대개 인생의 의미를 새로 발견하기 위해 핸들을 직업으로 택한다고 들었다.

- 새로움에는 걸림이 있게 마련이고, 장애를 넘어야 할 때가 생기는 법이지.

박 장로는 잠시 사탄의 꾐에 빠져 여호와의 뜻에 어긋난 길을 가고 있지만, 곧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미 그런 조짐을 보이더니 바로 내일 대폭적으로 판이 커지게 됐다. 총탄이 아닌 폭격을 맞고 계속 전쟁터에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런 다음에야 자기 본분을 찾는 게 세상 이치야.

털보 조 기사는 부인이 커다란 한식당을 운영한다. 주방장이었던 조 기사는 음식 냄새에 넌더리가 나서 운전대를 잡게 된 상자다. 역시 사람 좋은 조 기사도 돈 걱정은 없다.

박 장로와 기사 식당에서 만나 형님, 아우님 하며 가까워진 사이라고 들었다.

- 죽마고우의 우정도, 부자간의 의리도 찾을 수 없는 데가 놀음판이란 걸 난, 일찌감치 깨우쳤지. 우리 놀이터도 너무 빨리 놀음판으로 바뀌고 말았어.

하우스의 생리를 겪어본 바 있는 이 기사는 포커판만큼은 가까운 사람과 동석할 곳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매일 빨간 양말을 신고 다니는 김 기사. 그는 주식 마니아다. 주식뿐 아니라 펀드 fund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닌 김 기사는 다양한 펀드를 통해 제법 목돈을 굴리는 듯했다.

“나한텐 카드도 일종의 펀드야.”

언젠가 그가 얼큰하게 취해서 큰 소리로 떠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그에게 있어서 카드만큼은 절대 그의 돈을 부풀릴 종목이 되지 않는다는 걸 세 사람 모두 익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가장 많은 돈을 잃은 사람도 빨간 양말이다. 그는 카드 실력도 변변찮았는데 치명적인 건 카드를 치면서 취기가 오를 정도로 술을 마신다는 거였다.

이 기사는 비슷한 연배의 김 기사에게 진심으로 그의 취약점을 지적해서 충고하기도 했지만 들어 먹히지 않았다. 아마 그는 내일도 흔들릴만하면 술을 마실 것이다.

김 기사한테 내일은 오지 말아야 할 불운의 날인 동시에 카드는 절대 펀드가 아님을 깨우치는 축복의 하루가 될 것이다.


결전의 날. 오전 일찍 천호동으로 방향을 잡은 이 기사는 휘파람으로 조용필의 ‘허공’을 멋들어지게 불어 제쳤다.

거듭 생각해 봤지만 미안한 마음을 갖거나 부담을 가질 것도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오늘 판돈 모두 싹쓸이를 한다면 섭섭하지 않게 개평을 줄 것이다.

가볍게 즐기기로 하고 뭉친 게 무색해지고 말았어도 그 사람들과의 인연은 계속 유지했으면 하는 게 이 기사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모처럼 괜찮은 사람들을 만났다. 더구나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일이 아니고도 자주 만나고 싶었다.

처음에 이 기사는 그들에 비해 카드 실력이 월등한 게 괜히 죄책감으로 작용했었다.

한때 하우스를 들락거리며 포커의 마귀급들과 일전을 치른 경험까지 있었던 이 기사였기에 아마추어 중에서도 초급 수준에 불과한 세 사람과 재미 삼아 즐기는 판에서 판돈이 늘어난 게 마음 한편 부담스럽기도 했다.

- 그렇지만… 그들 스스로 무덤을 판 거야.

세 사람은 평소와 다름없이 밝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이 기사 역시 편안하게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식사를 마친 후 바로 판을 벌였다.

“이 기사! 오늘은 좀 살살 다뤄줘.”

“하하하! 오늘은 더더욱 세게 나가야죠.”

털보의 엄살에 이 기사가 농으로 대응했다. 포커판이라는 게 농담과 웃음으로 시작해도 일단 판을 벌렸다 하면 승부욕이 동함으로써 경직되고 삭막해지게끔 되어있다.

여기라고 해서 예외일 리 없다. 한 사람당 5백만 원이 어디 애들 놀이인가.

“일차 테이블 머니는 어제 말한 대로 오백, 그밖에 룰은 전과 동!”

“아니, 하프가 아닌 풀 베팅으로 바꿉시다. 어차피 키워질 판인데 시간 끌 거 있나요.”

털보의 말에 빨간 양말이 하프 베팅을 풀로 바꾸자고 했다. 잠시 네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는데, “까짓것, 그렇게 하지 뭐. 김 기사가 나한테 빨리 손 털고 일어나라는 데 그렇게 해주지.”라며 박 장로가 말을 비틀면서도 동의를 표시했다.

비록 보스가 단독으로 만 원을 묻고 시작해도 풀 베팅이라면 무제한으로 판이 커질 수 있다.

의무적으로 학교를 가야 하므로 4구째 베팅부터는 최하 5만 원을 내고 다음 패를 받게 된다.

이 기사는 그들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곧 숨 막히는 레이스가 펼쳐짐과 동시에 그들의 표정이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질 것을 예상했다.


게임 시작 세 시간 만에 털보 조 기사가 은행을 다녀와야 했다. 1차 테이블 머니 5백만 원을 털고 다시 5백을 더 찾아온 것이다. 평소 불그스레한 그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고, 진작 웃음기도 가셨다.

예상과 달리 판돈은 빨간 양말 김 기사한테 몰렸고, 박 장로도 거의 바닥이 드러났으며 이 기사가 약 200만 원쯤 딴 상태다.

현재까지는 판의 흐름을 주로 김 기사가 이끌어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김 기사는 이미 맥주 네 병을 마시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 이 기사는 느긋했다.

- 흐흐흐! 오늘도 결과는 뻔해. 승리의 여신은 나한테 윙크를 했어.

이 기사는 서서히 판의 향방을 바꿔놓으리라고 마음먹었다. 6구째 카드가 돌려졌다. 이번 판에도 김 기사가 레이스를 주도했고, 나머지 세 사람이 끌려가듯 콜을 불렀다.

이 기사는 누군가가 김 기사의 레이스에 되감아 쳐주기를 바라면서 카드를 집었다. 이미 5구에 9가 세 장, 나인 트리플을 잡았다. 날개만 달아준다면….

이 기사는 알게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세 사람 중 누군가 자신의 표정을 보았다면 별 볼 일 없는 패가 붙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 그러나 날개를 달았어.

5가 뜨면서 9 세 장에 5 두 장,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나인 타이틀. 바닥에 깔린 패 5 하트, 8 클로버, 9 하트로 볼 때 5, 6, 7, 8, 9의 스트레이트이거나 포 four 플러시쯤으로 여길 만큼 타이틀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보스인 박 장로가 체크. 그러자 “후후, 이만큼 왔는데 그냥 갈 수 있나요.”라며 김 기사가 바닥 판돈만큼 베팅했다. 술기운이다.

알코올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확연히 보인다. 판돈이 약 100만 원 정도로 불어났다.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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