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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달마대사는 이곳에 왔었는가

전남 두륜산, 대둔산, 달마산

by 장순영

1979년 전라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두륜산頭輪山은 동쪽 사면의 경사가 급하고 서쪽은 비교적 완만한 산세를 이룬다.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산마루 지대는 대개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가 안부鞍部라 불리는데 두륜산의 연봉은 날카로운 산정을 이루지 못하고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어 둥근 머리 산이라는 의미로 두륜산의 이름이 연유하였다.



어둡고 거친 두륜산에서 남도의 여명을 밝히다


계곡 길 오심재를 지나 능허대라고도 일컫는 노승봉(해발 685m)에 다다를 때까지도 어둠은 쉬이 걷어지지 않고 흐릿하게 서기만 어릴 뿐이다. 두륜산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이곳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게 매우 안타깝다. 산과 바다가 공존하여 남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리상 여건이 두륜산의 특화된 장점인데 말이다.

여기서 가련봉 오름길도 상당히 어려운 구간이라 조망을 놓치는 안타까움은 접어둘 수밖에 없다. 두륜산 최고봉인 가련봉(해발 703m)도 인증사진을 찍는 일 외에는 달리 머물 이유가 없어 막간의 쉼도 없이 지나친다.

75. 뒤돌아보니 가련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배웅해준다.jpg 뒤돌아보니 가련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배웅해준다


바윗길을 조심스레 내디디며 넓은 헬기장이 있는 만일재에 내려설 즈음 날이 밝아진다. 삼거리에서 쇠줄을 잡고 철 계단을 밟아 오르면서 바위와 바위가 이어진 희귀한 모습을 보게 된다. 코끼리바위라고도 하고 구름다리라고도 부르는 기암이다.

두륜봉(해발 630m)에 올랐을 땐 습한 안개가 자욱하게 사방 시야를 막았다가 트이길 반복한다. 조금 지나 묵직한 잿빛 구름을 뚫고 솟는 해 아래로 땅끝마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또 지나온 노승봉과 가련봉, 가야 할 도솔봉도 그 지붕이 보인다.


가련봉 넘고 두륜봉 지나 도솔봉 오르는 고갯길

운무 가득하다가 하늘이 바다 되어 물결 일고

연초록 녹음 우거져 솔향 가득하니

두륜산 바윗길 홀로 걸어도 혼자가 아닐세


76. 두륜봉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다.jpg 두륜봉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띠밭재(해림령)로 가는 길의 깎아지른 암벽 아래로 길게 밧줄이 늘어져 있다. 오늘 산행 중 가장 긴장해야 할 구간일 듯싶다. 여기서 잠시 정체되긴 하지만 통과하는 이들 모두 안정감 있게 내려선다. 띠밭재와 대둔산으로 향하는 능선은 완만해 보인다. 뒤돌아본 두륜봉은 오늘 첫 방문객들을 떠나보내고 세수를 했나 보다. 정갈하다.

연화봉과 혈망봉도 막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대둔산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완만한데 이슬 젖은 산죽이 키까지 커서 행로를 방해한다.

땅끝 기맥 508m라고 팻말이 걸린 508m 봉에서 30여 분 가까이 걸어 중계소가 있는 도솔봉(해발 671.5m)에 닿는다. 정상부에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어서 정상석은 저만치 비켜 세워져 있다. 시설물은 종종 가야 할 길도 돌아가게 한다. 여기서도 중계소 울타리를 끼고 한참 우회해서야 암릉과 산죽 길을 걷는다.

저만치 달마산이 눈에 들어온다. 308m 봉을 넘어 꽤나 날카로운 암벽지대를 지나게 되는데 자칫 긴장을 풀었다가는 발을 헛디딜 수 있다. 바위가 미끄러워 스틱도 어긋나기 일쑤다.

오늘은 달마봉으로 바로 넘어서기 때문에 두륜산의 명찰 대흥사를 그냥 지나치게 된다. 신라 진흥왕이 어머니 소지 부인을 위하여 창건했다는 대흥사는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외에도 무수한 보물들과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는데 임진왜란과 6·25 한국전쟁 때 재난을 당하지 않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에 비해 큰 전쟁이 잦았던 곳에서 전쟁의 화마를 피해 문화유산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건 필시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하겠다.

대흥사 입구에 맑고 넘치는 계류와 동백나무, 왕벚나무, 그리고 후박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룬 장춘동 계곡의 수려한 경관이 아른거려 내려다보노라면 거기서 은은한 차향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 후기의 선승이자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의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선사의 다선 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데 그는 여기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차 문화의 중흥에 이바지하여 지금까지 한국 차의 성지로 주목받게끔 하였다. 거기서 배달된 한 잔의 차를 산 중턱에서 음미하고 일어선다.

고개 위로 도솔봉 가는 길도 거친 암벽 구간이다. 전망 좋은 큼직한 바위에 올라서자 바다 건너 완도가 보인다. 역시 남서해의 너른 물길을 멀리 따라갈 수 있어 마음이 평온해진다. 왼편 아래로 동해 저수지와 그 둑 밑으로 농토와 민가가 있다. 매일 달마산의 새벽 정기를 마시며 하루를 열 것이다. 주민들 대다수가 건강하게 장수할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만큼 해 되거나 거리낄 것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떡봉(해발 422m)을 지나서도 계속되는 암릉 군이지만 길은 아까 날 등을 타고 온 길보다 덜 까다롭다. 직벽 구간을 우회하여 고도 편차 심한 봉우리 하나를 지나면서 허기가 지고 갈증도 생긴다.

13번 도로를 내려다보면서 소모된 에너지를 보충한다. 빽빽한 소나무 숲과 채 지지 않은 철쭉, 파릇한 농토와 에메랄드빛 바다들이 마냥 평온하기만 하다. 다시 하숙골재라는 곳으로 내려서는데 아마도 여기까지가 지도상 대둔산이라 표기된 곳이기도 하고 또 여기부터 달마산에 해당하는 것 같다.



갖출 걸 다 갖추고, 보여줄 걸 다 보여주는 산


다채로운 형상의 바위와 암벽들을 깃발처럼 치켜세우고 길게 펼쳐져 달마산達摩山은 삼면이 모두 바다와 닿아있다. 고려 때 중국 사신이 해남으로 와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산이 달마대사가 다녀갔다는 그 산인가?”

“그렇소.”


주민들의 대답을 들은 사신은 산을 향해 예를 갖추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그 이름만 듣고 아득히 경배만 해왔는데 그대들은 여기에서 생장했으니 참으로 부럽도다.”


여기가 바로 달마 화상이 상주한 곳이라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림으로 그려간 것이었다. 중국으로 건너간 달마는 자신의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로부터 모함을 받아 죽게 되어 웅이산에 매장된다. 숨을 거둔 지 3년이 되던 해 달마는 지팡이에 짚신 한 짝을 꿰어 매고 서천(지금의 인도)으로 가고자 파미르 고원을 넘고 있었다.


“대사님!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때마침 서역에 다녀오던 위나라 사신이 달마가 죽은 사실을 모르고 그에게 물었다.


“서천으로 가는 길이네.”


사신이 도착하고 보니 달마는 이미 3년 전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달마대사의 묘를 파보아라.”


위나라 왕의 지시를 받고 무덤을 팠는데 짚신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이었다. 흔히 달마대사라고 일컫는 보리달마 Bodhidharma 의 전설이다. 그는 남인도 출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선禪의 씨앗을 뿌려 선종의 개조開祖로 여기는 부처의 28대 계승자이다. 보리달마는 부처의 심적 가르침에 돌아가는 방법으로 선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일파를 선종이라고 하였다.

하숙골재를 지나 달마봉 능선으로 가는 초록 숲길로 들어서자 이제까지 걸어왔을 때와는 또 다른 산행 분위기를 창출한다. 바위산에서 육산으로 접어들었는가 싶었는데 고도가 높아지면서 다시 암릉 지대이다.

힘이 떨어지지만, 달마산의 명물인 금샘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신비의 샘은 바위틈에 꼭꼭 숨어있었다. 석영의 주성분인 석질의 영향으로 금빛을 낸다고 한다. 물맛도 좋고 약효도 있다고 하는데 플라스틱 바가지가 지저분해 보는 거로 만족한다.

큰 금샘을 지나 대밭 삼거리에서 다시 작은 금샘을 통과해 달마산 정상으로 오르는 안부가 넓은 들판처럼 아늑하게 맞아준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극단의 양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부지런히 오른 전위봉 뒤로 정상인 불선봉이 고깔 모양으로 높이 치솟아있다.


“무사 기질이 강한 가문이군요.”

“그렇다네. 잘 살피며 걷다 보면 무사의 강인함도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걸세.”


돌탑이 쌓인 달마산 정상 불선봉(해발 489m)까지 암릉의 야무진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달마산의 가문 자랑을 새겨보니 남도의 금강산이란 표현에 수긍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정상이 무척이나 반갑고 초면이지만 오래된 만남처럼 친근감이 든다.

이곳의 봉수대는 완도 오봉산의 숙승봉과 해남 좌일산에서 횃불을 이어받아 불선봉의 명칭 유래가 되었고, 가뭄 때면 산 아래 주민들이 올라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줄지어 늘어선 뾰족 기암들 너머로 완도와 청산도를 볼 수 있으며 푸른 바다에 둥둥 뜬 작은 섬들, 다도해를 눈에 담게 된다. 갖춰야 할 건 다 갖추었고, 덩달아 보여줄 것도 모두 보여주는 달마산이다.

산 중턱 가파른 바윗길과 울창한 숲길에 평평하게 등산로를 닦은 달마 고도를 내려서고 다시 완만한 내리막을 걸어 육지의 가장 남쪽 사찰인 미황사美黃寺에 닿는다. 사찰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달마산의 연릉이 마지막까지 멋진 비주얼을 선사한다. 그런 달마산을 바라보며 달마대사가 이곳까지 오긴 했겠냐는 의구심이 든다.

77. 내려와 올려다보니 달마산이 미황사를 포근히 감싼 풍광이다.jpg 올려다보니 달마산이 미황사를 포근히 감싼 풍광이다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워 명명한 미황사에 남겨진 기록들은 달마대사가 땅끝 해남까지 왔다고 주장한다. 이곳 사람들은 달마가 이곳 땅끝에 머물고 있다고 믿는다. 미황사를 달마대사의 법신이 있으신 곳이라고 소개한다.

끊임없이 수행하고 노력하되 수행과 노력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그의 선법 가르침은 뚜렷하나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대개 설화적이다.

달마는 선정 도중에 잠들어버린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냈다. 그런데 그 눈꺼풀이 땅에 떨어지자 자라기 시작하더니 최초의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선사들이 선정 중에 깨어 있기 위해 차 마시는 걸 일상화시키게끔 하였다.

바위의 누런 이끼, 금빛 나는 금샘, 달마전 낙조를 미황사의 3 황으로 꼽는다는데 저녁 무렵 서해 낙조와 어우러지면 달마산도, 미황사도 더욱 황금빛을 발할 듯하다. 그처럼 찬연한 황금빛 중에 달마대사가 거기 있다는 걸 믿기로 한다.

남도에서도 가장 남쪽 끄트머리라 할 수 있는 강진에서 해남까지 일곱 산을 무사히 마치게 되어 다행이다. 여느 때의 연계 산행을 마친 후처럼 뿌듯한 감회보다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드는 건 그만큼 버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고도에 비해 암팡진 남도의 산들이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때 / 봄

곳 / 오소재 - 노승봉 - 두륜산 가련봉 - 만일재 - 두륜봉 - 띠밭재 - 도솔봉 - 대둔산 - 닭골재 - 달마산 불선봉 - 귀래봉 - 하숙골재 -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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