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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Jul 11. 2023

불편한 위로

'우리'는 '나'를 버리고는 성립될 수 없다


 가족의 품을 벗어나 처음 친구를 사귀고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순간부터 나의 행동에는 항상 친구가 함께였다. 같이 등교하고, 같이 밥 먹고, 심지어 같이 화장실을 가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끔 생각한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질문을 해대는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저 친구들과 아무 생각 없이 놀며 클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이른 나이에 인간사 비틀린 권력관계를 느낀 후부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왜’라는 질문들을 파생시켰고 나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왜 우리는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가’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협력을 통해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왜,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하느냐 말이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양문화권이 동양문화권보다 혼자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훨씬 쉽다. 반면 전통적으로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대한민국은 뭐든지 함께 나누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공동체 문화를 더 잘 수용하고 전체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상대와의 친밀성이 높아진다.

 문화적 가치는 절대적이지 아니하므로 흐름을 수용한다고 바른 것도 아니고 따르지 못한다고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우리’‘너와 나’보다 익숙한 문화 속에서도 태성적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라면서 이기적인 인간상의 표본이 되어 눈총을 받고 검열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주체적인 인간은 아니다. 내 생각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일은 안 하고자 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는 우유부단병을 달고 살았다.      

 

 나는 왜 친구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가?

 이건 의외로 간단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신났으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렸을 때야 친구관계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나는 왜 친구들과 함께 화장실을 가는가?

 화장실이라니, 이건 좀 더 까다로웠다. 나는 왜 함께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드러내지 않았다.

 교실에서 화장실까지 아무리 멀어도 100 미터 내, 거기까지 아무리 천천히 걸어간다 해도 5분 이내. 화장실을 가는 목표는 배변활동을 위함이다. 그런데 굳이 친구와 함께 그곳을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일일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 함께 가는 친구를 내칠 필요가 있는 일일까? 달리 생각하면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왜 서로를 대동하고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친구들과 다 같이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갔고, 혹여 혼자 가게 될 때면 후련하면서도 친구들에게 잘못해서 나만 고립된 것은 아닌지 고심했다. 


 그러니까,

 여전히 친근한 나는, 친구와 함께 있어야만 내 존재가 인정받는 것 같은 알량한 만족감에 홀로 서지도 못하는 미약한 존재였다.      

 사회적 시선에 혼자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함께 있으면 ‘나’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드디어 처음으로 음식점을 혼자 가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켜켜이 쌓인 감정들이 나를 닦달했고 결국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그때 먹은 거라곤 김밥 한 줄이었지만 후에 혼자서 할 수많은 행동들의 도화선이 되었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고, 혼자 나의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지금이야 흔한 일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지금도 두 부류 사이에 교차점은 많지 않아 보인다. 홀로 노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혼자만의 시간에 주저하는 편이다.  




 이것은 ‘우리’로서 존재하는 나를 부정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정이 많은 우리들은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지 못한다. 그리고 신변에 이상이 있는 건지 묻는다. 힘든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도와주겠다는 관심, 오지랖이든 뭐든, 을 보여준다.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작은 온정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끼고 인류애를 느낀다. 그리고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느낀다. 많은 역효과가 발생하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들이 세상을 나아가게 할 것이다.

 더욱이 함께 하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된다는 말도 있듯 혼자서는 느끼지 못할 다양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기준은 늘 상대적일 수 있다. '우리'는 '나'가 되고 싶어 하고 '나'는 '우리'가 되고 싶어 한다. 나 역시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우리를 내치고 혼자 하려는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낀 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 친구 또한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으리라. '우리'를 외치는 부류가 독불장군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우리’가 서로의 ‘나’를 존중할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뿐이다.

 온전히 ‘자신’만으로 존재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 ‘우리’도 협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타인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피해자이면서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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