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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야 Sep 17. 2021

마흔다섯, 머리를 기르다.

긴 머리 그리고 나의 이야기


나는 올해 마흔다섯이다.

마흔보다 마흔다섯이 된 요즘 내 나이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내가 생각했던 40대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통통한 몸집에 뽀글뽀글 짧은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 흡사 <달려라 하니>의 '고은애'였다. 내가 국민학생 초등학생 시절 우리 엄마 역시 고은애처럼 뽀글뽀글 파마머리였다. 미용실에 한 번 다녀오면 일 년은 거뜬히 견뎌낼 탄성! 친구 엄마, 옆집 아줌마, 큰 이모 등등 내가 아는 '아줌마'은 체구의 차이가 있을 뿐 헤어스타일은 대부분 비슷했다.


'아줌마=뽀글뽀글 파마머리'

 공식이 깨진 것은 사촌오빠 내외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때다. 호칭은 사촌오빠지만 나이로 치자면 나보다 한참 위인 삼촌 뻘이다. 새언니는 멋쟁이다. 모노톤 또는 채도가 낮은 의상을 주로 입지만 어떤 날은 베이비핑크 트레이닝복, 어떤 날은 흰 티와 청바지에 컨버스백 차림이었다. 하지만 머리만은 늘 우아하게 부풀린 어깨 기장의 생머리. 청담동 아줌마인 새언니를 볼 때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한때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짧은 파마머리가 유행한 적 있다. 일명 김남주 파마를 하고 새언니를 만난 날. "머리가 왜 이래?" 라며 언니는 크게 웃었다. 그렇다, 나는 김남주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 마흔 중반, 나도 아줌마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 인생 가장 긴 머리를 하고 있다. 지금의 내 머리가 너무 좋다. 휑한 앞머리가 가끔 신경 쓰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의 10대

: 반곱슬 긴 머리를 휘날리며


지역 내에서 유일하게 머리를 기를 수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다만, 머리는 꼭 묶고 다녀야 했다. 똥꼬 치마도, 쥐 잡아먹은 입술과도 거리가 멀었던 시절. 한창 외모에 관심 많은 여고생이 그 머리를 가만 둘리 있나. 선생님 눈을 피해 하루에 몇 번씩 머리 묶었다 풀어헤쳤다 반복하는 게 유일한 멋이라면 멋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내 행사가 있어 친구들과 운동장에 있는데


"야~!!!" 


2층 교무실 창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교무주임 선생님의 지휘봉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교무실에 끌려간 나는 지휘봉 끝으로 쿡 찔린 후 긴 연설을 듣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십 년 가까이 긴 머리를 고수했는데, 대학 졸업사진 속 나를 볼 때면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물에 젖은 미역줄기마냥 얼굴에 붙은 채 가슴까지 내려오는 검정 생머리. 게다가 적갈색 입술에 허옇게 찍어 바른 얼굴이라니. 제대로 흑역사다. 하지만 그땐 다 그랬다. 촌스럽고 어수룩해도 그 시절만의 '예쁨'이 있다.




나의 2,30대

: 긴 머리여 안녕


"언니, 어디 미용실 다녀?"

스무 살 중반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멋쟁이로 이름을 날리던? 언니에게 물어 언니가 다닌다는 미용실을 찾아갔다. 홍대 준오였다. 원장쌤은 내 머리를 한 바퀴 돌아보더니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염색을 해보자 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세련되었어?"

머리만 잘랐는데 모두들 다른 사람 같다 했다. 처음으로 단골 미용실, 담당 쌤이 생겼다. 그러나 몇 년 후 원장님이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약 문의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격을 물어보니 커트가 7만 원이란다. 후덜덜, 무려 15년 전 가격이다. 그 후로 10여 년을 단골 없이 이곳저곳 전전하다 지금은 마음에 맞는 미용실을 찾아 이용 중이다.


서른 살 즈음엔 회사 동료가 다니는 미용실을 따라갔다. 명동은 한창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얼떨결에 난생처음 쇼트커트, 그것도 웬만한 남자 머리보다 짧게 머리를 잘랐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남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쇼핑백을 손에 든 난감한 그의 표정이란. 깜짝 선물로 머리끈을 사 온 것이다. 쇼핑백 속 상자를 열어보니 보라색 자개 위에 반짝반짝 스팽글 장식이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안 맞아, 안 맞아. 참 안 맞아. 

그러고 보면 참~ 타이밍 안 맞는 사이인데. 이렇게 꾸역꾸역 십오 년 넘게 함께 하고 있다. 명동의 그 미용실은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았다.




마흔다섯,

다시 머리를 기르다


아들들이 꼬꼬마 시절, 짧은 머리는 나와 어울려서가 아니었다. 엉덩이 붙이고 밥 먹기도 버겁던 때였으니 말이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고 다시 일을 시작했던 때, 짧은 머리는 나와 가장 잘 어울리 스타일이어서였다. 20년 가까이 머리 기장이 어깨를 못 넘겼던 탓일까. 여성스러움의 극치인 굵게 말린 긴 웨이브 나의 로망이었다.


마침내 얼마 전,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머리를 했다. 코로나도 한 몫했다. 미용실조차 조심스럽고, 일도 쉬고, 사람 만날 일이 없다 보니 꽤 오랜 시간 나의 머리는 방치상태였다. 그렇게 머리가 어깨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미용실에 가서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사진을 들이밀었다. "다 괜찮으실 것 같아요." 다만, 지금 힘껏 볶기엔 기장이 애매하다고 조금 굵게 말자고 했다.


"엄마, 나 파마했어요."

친정엄마 집에 가서 간만에 발랄 떨며 말했다. (나는 굉장히 무뚝뚝한 딸이다.) 엄마는 말이 없다. 하지만 표정이 말한다. '미용실 간 김에 그 지저분한 머리 좀 자르지.' 일주일 후 다시 친정 갔다. 불쑥 엄마가 말한다. "넌 짧은 머리가 어울려. 얼굴도 길고..." 이 말이 하고 싶은데 일주일을 참으셨나 보다. "난 이 머리 좋은데. 말랐을 때보다 살찐 지금 딱이에요."라 말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다. 또 또 또 표정으로 말한다. '얜 왜 이리 말을 안 들어.'


15년 전, 10년 전, 5년 전
그리고 지금의 나


내 머리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마흔 넘어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내게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머리를 손질할 수 있는 물리적, 내적 '여유', 그리고 (주변에서 뭐라하든) 하고 싶은 것을 해 내  자신을 사랑하는 '자존감'을 의미한다. 긴 웨이브는 해 보았고. 훗날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흰머리가 제법 보이는 요즘, 이제 나의 로망은 짧게 자른 실버 헤어이다



상단 이미지: 애니메이션 <달려라 하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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