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마음은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너희는 누나한테 잘해야 해.
누나가 전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지?
나는 이 말이 너무너무 싫다.
내 동생들은 내게 희생을 강요한 적이 없다. 굳이 들어야 한다면 이 말은 동생들이 아닌, 부모님께 들어야 할 말이다. 어린 자식을 돌보는 것은 부모님의 몫이었다. 힘에 부쳐, 여력이 안 되어 그들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일을 내가 거들었다. 나는 그것을 갚으라 할 생각도, 받고 싶은 생각도 없다. 더 이상 그리 살지 않아도 된 현실이 감사할 뿐이다.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아휴, 조카들 등록금 한 번을 안 내주더라!
그래야 나중에 지 아플 때 조카들이 병원 한 번이라도 데려간다고. 그렇게 말해줘도 못 알아들어.
조카들 등록금 한 번 안 내준 바보는 엄마의 여동생, 나의 막내이모이다. 우리 엄마에게 늘 욕먹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이모는 서른 즈음 결혼을 했었고 몇 달 후 이혼해 이후 혼자 살고 계신다. 책임져야 할 식솔이 없어 먹고살 만하다고 조카들 등록금까지 내줘야 할 의무는 없다. 조카들이 이뻐 죽어 등록금 한 번 꼭 내주고 싶었다 하면 감사히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모는 엄마가 알려주는 대로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혼자 병원을 다니게 되었다는 논리라니.
평소 엄마의 말 대로라면 남들에게 잘해야 그만큼 나에게 돌아온다.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꼭 갚아야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엄마가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 때는 돌려받을 생각을 하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준걸로 끝내야 한다, 알겠지?" 어머니는 이번 명절 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신다.
신뢰하지 못하는
모녀의 대화
- 엄마: J가 명절 때 애들 옷 사주라고 20만 원 부친다더라.
- 나: J가요? 엄마가 시킨 거지?
- 엄마: 왜 그러면 안돼? 조카들 옷 좀 사 주라는 게 뭐! 그렇게라도 가르쳐야지.
- 나: 엄마가 예전에 이모한테도 그랬잖아. 조카들 좀 챙기라고. 그래야 나중에 병원이라도 한 번 데려간다고.
- 엄마: 아이고, 그러니까! 그렇게 말을 안 들어, 걔가
- 나: 본인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사람한테 마음의 짐을 지게 해요.
- 엄마: 얘가 왜 이래? 똑같이 말해줘도 듣는 놈이 있고 안 듣는 놈이 있어. 지인은 내 말 듣고 집 사서 내가 이런 인생을 살게 될지 몰랐다며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른다.
갑자기 집 얘기? 니가 왜 여기서 나와?
J는 첫째 남동생이다. 외국에 사는 남동생 내외에겐 아직 아이가 없다. 나도 모르게 막내이모의 상황과 오버랩되었던 걸까? 내가 엄마의 말에 반기를 들 때면 어머니 당신의 말을 들어 덕 본 사람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오는데 도대체 넌 말을 들어먹질 않니. 그래... 우리는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대화는 또 그렇게 싸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모녀의 대화는 늘 그자리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었을 때는 돌려받을 생각을 하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준걸로 끝내야 한다, 알겠지?"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는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막내 이모는 조카가 예뻐서 혹은 언니들을 돕고 싶어 조카의 등록금을 내주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내게 하는 엄마의 발언대로라면 등록금을 대 준 이모는 나중에 조카들에게 어떤 형태던 돌려받을 기대를 할테고, 이는 서로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는 것이다. 감사한 마음을 들게 해 병원에 데려갈 그 조카가 과연 누구겠는가. 내 남동생들? 다 큰 성인 아들이 엄마의 여동생까지 병원을 모시고 다니는 그림은 쉬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 조카란 결국 여자 조카들, 나와 큰 이모네 딸들인 것이다. 큰 이모도 엄마와 같은 생각일까? 큰 이모와 막내 이모는 한 동네 도보 5분 거리에 산다. 하지만 막내 이모가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우리 엄마이다. 큰 이모에겐 딸 둘, 아들 하나가 있다. 큰 딸은 마흔셋의 골드미스고, 둘째 딸은 베트남에 산다. 당신 딸, 그리고 조카딸들에게 이모 수발까지 기대하는 것. 이런 논리를 어찌 그리 당연히 주장하시는 것인가.
누군가의 딸과 그녀의 딸
착한 아이들의 비극
베풀 때 무언가를 바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 좋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고작 열세 살, 열한 살 아이들에게 만날 때마다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머니, 그 말은 결국 딸인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아닌가요? 네가 했던 고생, 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을 억울해하지 말거라. 돌려받으려 하지 말고 그만 털어버려리는 의미 아닌가요. 제가 그리 보이시나요?
최근 <착한 아이의 비극>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엄마의 '착한' 딸이다. 열 살의 아이는 부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착한 척' 연기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마음 깊은 곳 부모를 신뢰하지 못하고 적의를 품고 있었기에 말투엔 가시가 돋히고 늘 불만 투성이었을 것이다. 할 말 따박따박 하고 덜 예민한 다른 형제(아들들)에 반해 나는 만만하면서 거슬리는 존재였다. 알아서 기면서 자꾸 징징거리는 아이가 고마우면서도 짜증이 났을 것이다.
내 깊은 곳 모난 돌이 또 발동 걸렸나 보다. 그저 웃어넘길 일들을 나는 또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것인가? 멀리 볼 줄 아는 현명한 어머니를 나쁜 사람으로 내몰고 있는 것 아닌가? 이상적인 어머니의 이상한 딸. 내 불편한 마음을 반성하며 나는 오늘도 자책 중이다.
왜 우울증에 걸리는 착한 아이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걸까.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부모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마음 깊은 곳에서 부모에게 적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상대를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착한 아이'와 부모 사이에는 이러한 신뢰가 없다.
'정서적으로 미성숙하고 애정 결핍이 강한 부모'는 착한 아이에게 어리광을 부린다.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들기 때문에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결과가 된다. 자녀는 부모에 대한 불신감에서 '어리광'을 단념하고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p 58
- 가토 다이조 <착한 아이의 비극>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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