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위 오줌 자국
어느 날부터였나. 우리 집 변기 위에 오줌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변기를 이용하는 건 남편과 나 뿐이었다.) 몇 년간 남편이 조심한 건지 내가 무뎠던 건지 모르겠다. 문득 변기 시트 위 오줌 자국이 눈에 띄었고 몇 번은 물을 뿌리고 일을 보았다. 하지만 한 번 눈에 띈 오줌 자국은 줄어들 줄 몰랐다. 안 되겠다 싶어 남편을 불러 이게 뭐냐 물었다. 당황하며 얼버무리는 그에게 변기 시트 좀 올리고 일 보자고 말했다. 그 후로도 종종 변기 시트에 오줌이 묻어있었다. 다시 그를 불렀다.
"자기야, 이게 뭐야? 바지 내리고 여기 앉아봐."
달려들어 바지 내리는 시늉을 하자 남편은 기겁을 하며 도망갔다. 그 후 아~주 가끔 오줌 자국이 보이지만 한사코 본인은 아니라 하는 남편. 이제 용의자가 세 명으로 늘어 범인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일을 겪으며 시댁에 가보니 시댁 변기 시트에도 매번 오줌이 묻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묻은 채 굳어있는 자국들. 시댁에는 아버님, 어머님 두 분이 사신다. 내가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변기 물청소이다.
변기 시트를 올리지 않고
일을 보는 남자들
아가씨와 어머님은 그동안 어떻게 사셨지?
아가씨도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변기 청소를 하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털썩 주저앉아 일을 보나?
아가씨는 털털하다.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친정을 자주 방문한다. 아가씨에겐 중학생 딸이 있다. 언젠가 내가 먼저 시댁에 도착한 날, "급하다 급해"라며 모녀가 부리나케 안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구나, 여자들은 안방 화장실을 이용하나 보구나. 하지만 시댁은 몇 년 전까지 화장실이 하나였는데, 그때는 어떻게 했단 말인가.
변기 시트 올리는 일이 귀찮아 그 위로 오줌을 누는 남자들. 누런 오줌이 묻은 변기에 생각 없이 앉던가 그 변기를 매번 손수 청소하고 이용하는 여자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나는 안방 화장실을 쓴다 해도 문제는 거실 화장실을 쓰는 아들들이다. 응가하러 간 아이들이 그 변기에 털썩 주저앉을걸 생각하면 변기를 그냥 둘 수가 없다. 쉬 하러 간 아들들이 내려와 있는 그 변기 시트를 손으로 올린다 생각하니 상상만으로 토가 나올 지경이다.
대화가 필요해.
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시댁에 간다. 시댁에 가면 안방에 들어갈 일이 없다. 당일로 갈 때는 대부분 거실과 부엌에 머물고, 명절이나 생신 때는 작은 방에서 잠을 자니 그 동선을 벗어날 일이 거의 없다. 앞으로는 여성전용(?) 안방 화장실을 이용한다 치자. 남편은 따로 둘째를 데리고 종종 시댁에 간다. 그때마다 "둘째야, 꼭 안방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하여라" 주의를 줘야 하나?
시댁 분위기대로 불편해도 그냥 감내하며 지내야 하나,
이것은 옳지 않다 이제라도 이야기를 해야 하나.
올 추석 시댁에 있는 내내 홀로 고민했다.
시부모님과 관련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이야기하면 남편에게선 늘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시골분들이라 그렇다는 것. 남편은 어린 시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이번 추석, 사춘기 아들의 비매너 행동에 빡친 남편은 아들을 향해 폭발했고 거친 말을 내뱉었다. 집으로 돌아와 대화를 시도하며 나는 조심스레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 물었다. 그는 답하길 원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아야겠다고 했다. 당신이 물려받은 안 좋은 습관이 아이들에게 답습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아이들이 이해가 안 되면 책도 읽고 상담도 받아보자 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고칠 테니 부모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그는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채 한동안 입을 닫았다.
결국 퉁 치기로 했다.
"어머님, OO오빠 화장실 가면 소변 냄새가 너무 심해서 물청소해야 해요." 둘째 남동생 내외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올케가 엄마에게 말했다. "어머님, OO아빠가 변기 시트도 안 올리고 소변을 봐요." 나는 왜 시어머니에게 말을 못 했나. "아버님, 변기 시트 좀 올리고 일 보세요." 왜 지금이라도 말을 못 하나.
남편은 우리 엄마에게 참 잘한다. 어떤 때는 딸인 나보다 낫다. 그런 남편에게 시댁에 대한 불만을 말하기란 쉽지 않다. 더불어 그런 그에게 '부모, 조부모 앞에서 할 말 다하고 싸가지 없는' 아들들이 곱게 보일 리 없다. 남편은 좋은 아들이자 사위이다. 하지만 좋은 아빠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평소에 허허하며 참고 참다 갑자기 폭발하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오늘 첫째가 내게 물었다. 아빠 분노 조절 장애 있는 거 아니냐고.
우리 집에는 남자 셋, 여자 한 명이 산다. 다수를 위해, 그리고 오줌 자국의 안좋은 경험 때문에 나는 일을 보고 변기 시트를 올리고 나오곤 한다. 아마 앞으로도 시댁에 가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변기 청소일 것이다. 이번 명절에도 몇 번이나 변기에 물을 뿌렸다. "아버님, 변기 시트 좀 올려주세요." 말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론은 우리 엄마에게 잘하는 남편을 위해 변기 청소로 퉁 치자였다. 다만 고민되는 것은 이런 불합리함의 대를 어떻게 끊어내고 아들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둘째는 종종 변기 밖으로 소변을 튀기며 일을 본다. 그런 아이를 타이르고 잘 가르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선이다. 남편이 종종 큰 아들로 비유되는 것을 본다. 나 역시 글을 쓰며 종종 남편을 첫째 아들이라 칭한다. 다 큰 어른에게 이런 것까지 알려주고 칭찬해줘야 하나 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남편이 설거지를 시작한 시점도 결혼 후 대략 10년째 되던 해였다. 그의 마음을 한번 더 동하게 하려면 다시 10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걱정스럽다. 아이들과의 소통이 중요한 '나'와 부모 자식은 상하관계라는 '남편'. 아이들 사춘기가 심해질수록 부자 간, 부부간 격렬한 충돌이 예상된다.
시대가 변해도 착한 아들,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부부는 오늘도 치열하게 조용히 전쟁 혹은 타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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