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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야 Sep 18. 2021

칭찬은 어린 나를 병들게 했다.

옛 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지지리도 재미없는

초등학생 일기장


30년도 더 된, 나의 초등학교 일기장을 읽어본다.

... 재미없다. 어떻게 이렇게 재미없을 수 있? 똥꼬발랄 초딩 아들들 글만 보다 어린 시절 나의 일기를 읽어보 실망이 크다. 거의 모든 글이  "재미있었다", 또는 "기쁘게 해 드려야지."로 끝을 맺는다. 재미있었다는데 하나도 재미가 없어 보인다.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는 또 뭐람.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한 것도 아니고 식사, 설거지에 빨래까지? 일기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민다. 내 일기인데 '내'가 없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나는 열두 살이었다. 지금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딱 중간 나이. 저녁 식사시간 갑자기 복장이 터진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는 사는 건지 궁금한, 내 앞의 맑디맑은 영혼들을 보며 속으로 외친다. '나는 느그 나이 때 가족들 식사를 차려냈댄다, 이놈들아!'


■ 날짜: 1988년 1월 5일 화요일
■ 주제: 나의 행동

요즈음은 우리 식구들이 나에게 칭찬뿐이다. 이유는 부모님께서 일 나가시고 동생하고 나만 남으면 내가 식사나 설거지 간단한 빨래를 거의 하니까... 나도 철이 드는 것인가? 나는 예전 그대로가 좋은데... 하지만 요즈음은 노는 것도 싫고 집안일 거드는 것이 더욱더 즐거운 것만 같다. 어떤 때는 잘못한 일로 꾸중 들은 적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동생을 기쁘게만 해주면 되지 뭘...
■ 날짜: 1988년 1월 28일 목요일
■ 주제: 칭찬

매일 엄마 친구분들이나 가까운 사이의 분들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칭찬이 자자하다. "네가 설거지한다며? 청소도 한다며? 나도 이런 딸 하나 있으면 걱정 없겠다.", "아이고 착하게 생겼네" 등이다. 엄마께서 소문을 내고 다니시나 보다. 방학이라 조금씩 도와드린 것뿐인데... 앞으로도 열심히 엄마 일을 도와드리겠다.
열 두살 때 일기




열 살부터 시작된

가족을 기쁘게 하는 일


열 살부터 시작된 '가족을 기쁘게 하는 일'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동생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한 즈음이겠다. 어릴 땐 집안일로, 성인이 후엔 돈으로 가계에 보탬이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과외와 동네 빵집 아르바이트를 뛰어 번 돈은 모두 집에 갖다 드렸다. 취직 후에는 내 용돈 제하고 몽땅 엄마 계좌로 이체했다. 왜? 어쩌려고? 같은 질문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일을 하지 않으니까, 엄마가 힘드니까, 래야 칭찬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 왔으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슬프게도 그 칭찬이 나를 병들게 했다.

어린 시절 나는 늘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열 살 소녀가 칭찬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족을 위해 일하고 동생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나보다 더 힘든 이(엄마)가 있기에 투정 부릴 생각도 못했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열 살 때 일기를 발견했다. 아홉 살 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열 살 즈음부터 나의 '착한 딸 컴플렉스'가 시작되었나 보다.


■ 날짜: 1986년 6월 10일 화요일
■ 주제: 엄마 도와 일하기

오늘 엄마께서 회사를 갔다 오자마자 쓰러지셨다. 몹시 피곤하신가 보다 하고 생각한 나는 엄마를 위하여 걸레, 양말을 빨고, 설거지를 하였다. 그리고 내 방을 닦기도 하였다. 그랬더니 엄마께서는 "우리 OO가 참 착하네, 청소까지 하고...""라고 말씀하셨다. 다음에도 엄마를 도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것이다.
열 살 때 일기




우리 아이들이

칭찬받는 이유


"요즈음은 우리 식구들이 나에게 칭찬뿐이다.

 라 쓰여있는데. 왜 그랬을까?"

일기의 칭찬 부분을 읽다가 옆에 있던 둘째에게 물었다.

 

"웃겨서?"

"공부 잘해서?"

아이가 답했다.


아.. 우리 아이들은 칭찬받는 이유를 '웃겨서' 혹은 '공부를 잘해서'라 생각하는구나. 나쁘지 않다.

최근 학부모 상담 때 첫째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OO이는 장난꾸러기"라고. "선을 넘지는 않는다"고.  전화를 끊고 나는 만세를 불렀다. "하아, 다행이다. 제 나이에 맞게 밝게  잘~ 크고 있구나, 우리 아들."  똑똑하다는 말보다, 모범생이란 말보다, 장난꾸러기라는 말이 내게는 더없이 칭찬으로 느껴졌. 나를 춤추게 했다.(칭찬타령은 이제 그만!)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도 느낌이 매번 다를 때가 있다. 몇 년 전 이 일기들을 들춰봤을 때 나는 아~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저녁 내내 아주 괴로웠다. 상처에 소금을 뿌린  많이 아팠다. 


지지리도 재미없는 초등학생의 일기. 하지만

일기를 읽다 보니 어린 시절의 내가 보였다.

엄마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아주 조금...

가슴이 먹먹해진다. 위태로운 어머니와 일찍 철이 들어버린 딸. 그녀들이 가엽다




Photo by Laura River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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