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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권 Jul 19. 2024

낮 술

고래가 사는 세상

 어제는 평소 연락도 없던 동창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던 친구라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더니 ! 전화를 다 받네 라며 어디서 낮술을 했는지 횡설수설 엄청 친한듯한 말투로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기에 야! 나 지금 전철 안이니 나중에 통화 하자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짜식은 내가 안주로 보이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 내가 아직 술 마신 그런 친구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줄 만큼 여유나 인내심 더 가서 배려심 그런 게 부족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여간 술만 마시면 전화하는 애들이 종종 있는데 그럴 때는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외로워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낮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해는 하면서도 술 마시고 말 많은 그 꼴이 나는 보기 싫어 그런 전화는 까칠하게 대답하였던 때문인지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는 나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게 나있는 걸로 알고 있다. 더군다나 얼마 전 백내장 수술로 금주중인 내게 그런 전화는  너무 짜증 나고 나를 약 올리는 일이라 나의 말투가 더오버 했을지도 모른다. 70세가 지나고부터 딱히 할 일이 없어선지 시간의 여유를 가지게 된 이후 언제부턴가 나는 낮술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도 점차 나와 함께  낮술을 마시는 시간대로 약속시간을 옮겨 오기 시작했다.  백수들 주제에 꼭 저녁에만 술을 마셔야 하냐는 내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나이에 술 마시고 비틀비틀 밤거리를 다니다 객사할지도 모른다고 겁주는 내 말이 좀 효과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낮에 길을 다 보면 낮술 대환영 이란 술집 간이 간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내겐 참 반가운 그런 문구였다. 그러나 복잡한 점심시간을 피해  술안주 때문에 찾아가는 식당들 대부분은  그 시간대에 브레이크 타임과 겹쳐 어정쩡한 시간이라 난감할 때가 많았다. 물론 식당일이 힘든 일이기에 휴식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낮술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애매한 시간대라 아쉬울 적이 많은 게 사실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래전 회사 근처 을지로 입구역 지하에는 OB맥주에서 직영한다는 커다란 맥주집이 있었는데 맥주도 신선할뿐더러 안주도 적당한 가격이라 이른 저녁부터 술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와글와글, 얼마나 시끄러운지 옆사람 말소리조차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던 그런 가개였다. 그러나 낮에는 그곳이 경로당으로 불리었는데 낮시간대 그 앞을 지나칠 때면 창안으로 보이는 테이블 여기저기 영감들이 모여 앉아 낮술을 즐기고 있었고 그 모습이 참 한가롭고 다정스러워 보였는데 어느새 내가 그 기억 속의 노인들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그런 곳도 보이지도 않지 친구들 대부분 모이는 약속장소가   종로. 을지로 주변으로   노인들이  북적거리는 동네들인데 여러 가지 이유는 있겠지만 기왕 한잔을 하더라도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분위기의 장소가 어디 없는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다. 일본에서 낮술을 히루자케라고 하는데 친구말에 의하면 도쿄에도 우에노를 비롯 낮술 명소가 많다고 한다. 하여간 해외를 여행하다 보면 어느 곳에서나 낮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았었고 정답이 없는 인생이기에 마시는 그 이유 또한 다양하리라 생각했다. 어느새 진심으로 낮술 예찬론자가 돼버린 나지만 마시는 분위기만큼은 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은 버릴 수 없었다. 이제 좋은 술과 음식을 마주할 날도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낮술을 즐기면 시간이 늦춰질 것만 같은 착각 속에 조용히 몸속으로 술을 흘려보내고 있다.

지친 나비가 날갯짓하며 이곳저곳에서 쉬어가듯 낮술도 나를 쉬어가게 만드는 세월 속의 쉼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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