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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권 Sep 29. 2024

억새가 슬피 우는 계절

고래가 사는 세상

헨델의 파사칼리아 피아노 음률이 어울리는 아침, 화창한 날씨에 소슬한 바람까지 불어오는 이런 날 집에서 뭉개기에는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전철을 타고 안국역에 내려 가회동길로 들어서니 그야말로 거리가 외국인들로 인산인해. 이 동네는 명동과 달리 서양인들이 많았고 보기에도 거북한 엉터리 한복을 입은 동남아 여성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볼거리가 있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유연하고 건강한 걸음걸이 그리고 즐겁고 활기찬 모습이 좋아 보였어요. 예전에 나도 다른 나라를 갔을 때는 피곤할 줄도 모르고 종일 걷고 또 걸으며 돌아다니던 내 모습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이제 모든 게 시들어 간다고 느끼게 되는 요즘 건강해지려고 조금 신경은 쓰고 있지만 점점 진행되는 몸의 노화를 막을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면 맥이 풀립니다. 또 한편으로는 늦춰서 무얼 하겠느냐는 생각도 들기에 생각마저도 갈팡질팡 중심을 못 잡는 듯하고요. 정신과 육체의 골격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결국 우생마사(牛生馬死)의 뜻대로 사는 게 옳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얼마 전 인가 텔레비전에 장관 후보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육사를 나오고 3성 장군까지 지낸 사람의 걸음걸이가 이상해 보였습니다. 고릴라가 걷는 모습처럼 보이는 그건 급격한 노화 현상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이를 보니 나보다도 거의 10여 년은 젊던데 말입니다. 연세가 아주 많은 시골 노인들의 굽은 허리와 걸음걸이 그런 것만 봤던 나로서는 나보다 젊어도 저럴 수가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해봤습니다. 군에 있을 때 수송부 앞을 지날 때면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라는 글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사람도 그래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달며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늘 병마와 싸우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생로병사는 당연한 줄 알면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영화 버킷리스트의 주인공들처럼 살아가는 세상사람들 , 어쩌면 잊고 사는 게 약일지도 모르지요. 머리숱이 없어 모자를 쓰고 다니는 친구들, 몸이 아팠던 얘기만 늘어놓다 헤어질 때면 신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어기적 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서는 친구들의 뒷모습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아직 완전한 가을도 오기 전인데 낙엽이 바스러져 거리를 나뒹구는 그런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먼저 연상하게 되는 나는 가을을 즐기려는 마음의 여유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기에 앞으로는 단풍이 물드는 그아름다움을 영원히 잊을 수도 있겠지요.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눈시울이 붉게 물들 것만 같은 이런 날 내 눈 안에 소소한 것들이라도 담아두려는 나의 생각이 이젠 그 의미도 이유도 퇴색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제 세월 속에 모든 게 묻혀 가지만 남은 것이 그리워 가을 감성이 물씬 풍기는 가회동 거리를 서성이다 국화꽃 화분이 놓여 있는 아름다운 가개에 들려 쓸만한 명함 지갑 하나 건졌어요.ㅎㅎ 돌아오는 길에 누구라도 불러내 한잔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청명 한 날을 술로 희석시키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회수 일음 삼백배(會須一飮三百杯)라고 한번 마시면 3백 잔을 마셔야 한다는 이백의 글처럼 늘 그런 마음은 품어보지만  꼭 그런 건 아니더라도 친구가 가지고 오겠다는 좋은 술한병이 눈앞을 가로막기에 침부터 먼저 삼켜보게 되는 좋은 가을날입니다. 친구들아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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