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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고래가 사는 세상

by 구일권


나의 학교 친구들이나 선, 후배들은 거의 대부분 보수 성향인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은 매주 주말 광화문 집회에 참석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 열정도 대단하다는 생각일 뿐 자칭 중도 보수를 자처하는 나는 지금까지 아무 미동도 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적도 없었다. 여당 얘기만 나오면 혼자 발끈하는 마누라에게 가스 라이팅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우로 기울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상머리에만 앉으면 도이치 모터스가 양평땅이 어쩌구 하면서 거품을 무는 마누라와 언쟁을 벌이다 싸워서 일주일씩 말도 안 하고 지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어느 종교 집단에 세뇌당한 듯한 마누라의 생각이 바뀔 거라는 생각은 불가능해 보이기에 진절머리 나는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게끔 신경을 기울이며 조심스래 지내고 있었다.눈내리는 엄청 추운 날씨에도 은박지를 몸에 두르고 밤까지 새워 가며 집회에 나와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편향된 사상이라는 게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너무 무감각한 건 아닌지 모르지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는 걸 보면서도 나까지 한쪽으로 기울어져 그 무리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기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고교 5년 선배이며 과거 국가대표 배구 유명 세터였던 선배가 조선일보 논설위원 金大中 칼럼을 보냈길래 암투병 중인 양반이 건강 관리나 잘하시지 뭔 이런 글을 퍼 나르실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동안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수시로 보내는 많은 글 중 얼핏 정치에 관한듯한 글이 보이면 바로 지워 버렸는데 80도 넘은 선배가 모처럼 보내주신 글이니 그냥 생각 없이 읽었다. 그러다 결국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밤을 날려 버린 채 글을 적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형도 고향이 전라도 양반인데 이런 내용의 글에 동조한다?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헷갈리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 다시 생각해 볼까 라는 생각에 나는 좌고우면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정치에는 별관심이 없는 나였지만 새삼스레 내가 세상을 너무 소극적이고 안이하게 살아온것만 같았다. 하지만 70 중반을 넘긴 내가 살아오는 동안 4.19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의 계엄을 경험했고 12.12 사태 때는 그 와중에도 해외로 출국한 적이 있는데 공항 계엄사령부에서 찍어준 출국스탬프가 남아있는 여권이 지난 역사의 한 흔적인 거 같아 서랍 속에 남겨두고 있다. 4.19 때 인가는 저녁 7시부터 통행금지가 시행됐고 5.16 때는 탱크가 요란하게 광화문 일대에 진입하며 흰 완장을 팔에 두르고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출장 시 태국이나 캄보디아에서도 계엄사태를 목격했던 나로서는 이번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때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이후 일어날 후유증도 그렇지만 특히 경제문제가 걱정되어 혹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들은 게 사실이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곧 계엄이 해제되긴 했지만 계엄이 고도의 통치 행위였다는 대통령의 말에 법을 아무리 잘 알아도 그렇지 지금 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데 이건 장난도 아니고 이런 일을 저지른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리고 제대로 준비도 안 된 계엄 때문에 이 사달이 났으니 결국 국민을 분열시키는 결과만 남긴 거 아닌가. 그러니 국민들이 받은 상처는 어떻게 치유시킬 것이며 모두를 화해시킬 방법은 있는 건지 권력의 맛을 본 정치꾼들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 살길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으니 암울할 뿐이다. 어떻게 됐던 모든 책임은 불안과 혼란을 야기시킨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다고 하나회 같은 조직을 가진것도 아니고 고작 검찰이나 고교동문 만 믿고 서울의 봄이란 영화의 전두광이 흉내를 낸 건지 의중을 짐작할수도 없다.어찌됐던 국군통수권자의 명령에 따른 애꿎은 군과 경찰들만 곤욕을 치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오래전 사단장이 별 하나였던 시절 사단장이 움직인다는 소리만 들려도 산천초목이 흔들렸는데 이번일로 불려 나온 장성들의 면면을 보며 뭔가 허접한 인생사의 허망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과정을 보게 되어 가슴이 아팠다. 전후를 알고 보니 애초부터 계엄시도 자체가 엉성했기에 잘 될 턱이 없었다. 계엄 이유는 야당이 너무 흔들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떻게 자기 입맛에 맞을 수만 있겠는가. 반대편이라도 꼬드기고 달래고 화해하면서 동반자로 어차피 같이 가야 하는 건데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과 그렇다고 탄핵만 일삼는 야당 또한 곱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국민을 위해 좋은 일이라면 무조건 협치를 해야지 반대를 위한 반대 그건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다. 고사에 오수척천하비( 나는 정사에 골몰하여 여위었지만 천하는 태평하고 백성은 부유하게 되었다)라는 말처럼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오직 국민만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보수고 진보구 간에 수많은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온 나라를 돼먹지도 않은 것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국민을 분열시키는 행위를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이번일로 군과 공무원들의 자괴감으로 인한 기강마저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지만 끈질기고 강한 민족이니 곧 회복되겠지 하는 희망의 끈을 꼭 잡고 있다. 어느새 고령사회의 알 박기 신세가 되어 신음소리만 늘어나는 나의 말이 솔직히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그러나 지금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때가 너무 묻은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세탁기에 돌려 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뿐이다. 봄이 서서히 녹아드는 3월인데 내가 좋아하는 안국동, 이혼돈의 거리를 무작정 걷기에는 너무 힘들고 아프다. 무사하게 돌아오시게. 우리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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