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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연 Jan 19. 2022

먹고 남은 것들

먹고 남은 것들이 책임지는 일상

짜장면 소스와 짬뽕 국물, 그리고 마지막 남은 백김치 한 그릇과 냉동밥. 이것들은 모두 그릇이 아닌 보관용기에 담겨 있는 채로 내 입에 들어간다. 반찬통 세 개를 늘어 놓고 냉동밥을 데워 먹는 모습은 역시 그럴듯한 끼니와는 거리가 말다. 그저 끼니를 때우는 것으로만 보이는 이런 밥상은 남들 앞에 공개하기는 꺼려지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 배달시켜 먹는 중국집의 짜장면은 소스가 아주 넉넉해서, 면을 비빈 다음 남은 소스를 덜어 놓고 다음 끼니에 반찬으로 먹는다. 짜장면이 그리워 레토르트 짜장 소스를 데워 먹기도 하는데 중국 요리 전문가가 만든 짜장 소스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먹는 건 아주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덧붙여, 요청하지 않아도 함께 오는 짬뽕 국물은  짜장을 맛있게 먹기 위한 확장 아이템이다. 짜장은 고소하지만 기름지다. 짠맛은 먹다 보면  금방 익숙해져 전체적으로 맛을 느끼는 감각이 둔해진다. 이럴 때 짬뽕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면, 입안이 개운하게 리셋되면서 다시 짜장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짜장과 짬뽕 사이를 오가다 한 번씩 집어 먹는 단무지나 신김치가 연달아 입맛을 돋운다. 내 앞의 음식들이 갓 만든 음식이 아니라도, 남은 것들로 차린 밥상에서 맛의 조화를 발견한다면 식사는 기대한 것보다 즐거워진다. 


이 밥상도 그렇다. 짜지만 구수하고(짜장), 맵지만 개운하고(짬뽕), 시큼하고도 알싸한 맛(백김치)가 돌아가며 입안을 자극한다. 서로 적당히 균형을 이룬다면 각각의 것은 최고로 맛있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먹다 남은' 것들을 먹을 때, 그 순간의 모양새는 비루해 보이지만 사실 내 일상의 많은 끼니는 갓 만든 음식이 아닌 남은 음식들이 책임지고 있다. 먹다 남은 음식은 다음 끼니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주고, 먹이를 준비하고 만들고 치우는 과정의 피로감과 부담감을 줄여준다. 


남은 음식들로 우연히 차려지는 밥상 앞에 앉에 묵묵히 먹는다. 

오늘도 나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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