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에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그냥 먹을 것도 없다'
처음 밤조림이라는 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제철 밤은 귀하다. 그때가 아니면 싱싱한 밤을 먹을 수 없다. 자연에서 나는 대부분의 과실이 그렇지만 밤은 영양이 풍부한 만큼 벌레들이 좋아하고 빨리 썩는다. 살아있는 과실이기에 당연한 일인데도 너그럽지 못한 나는 그런 결과가 마뜩찮았다. 장터에 우르르 쌓여 있는 밤을 보면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지 의심부터 했다. 밤을 산다는 것은 '내가 오늘 운이 좋은가, 아닌가'로 운세를 점쳐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모험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밖에. 밤이 뭐라고 이렇게 열렬히 재고 따지는 걸까? 답은 빤하다. 밤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만큼 기대하니까. 조금이라도 실망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얼마나 좋으냐고 묻는다면, '밤 속에 웅크린 채 몸을 불려가는 벌레들의 삶이 애처롭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이라고 말할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을 설탕에 조리다니, 모호연 인생에 크나큰 사건이다. 그냥 쪄먹고 구워 먹어도 맛있는 것을 설탕에 조린다고? 괜한 짓이라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수중에는 내가 책임져야 할 4kg의 공주밤이 있었다. 마트의 원쁠원(1+1) 행사에 제대로 낚인 까닭이었다. 원 없이 밥솥에 쪄먹고, 오븐에 구워먹고, 일부는 찰밥을 지을 때 넣을 수 있도록 껍질을 까서 냉동하고.... 이틀간의 행복한 먹부림에도 밤이 절반은 남았다. 벌레의 역습을 걱정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밤을 조리는 타당한 이유가 있구나. 제철이 아니어도 밤을 먹고 싶은 사람들이 저장하려고 조린 것이겠구나.
설탕으로 조린 밤을 본래의 밤만큼 사랑하게 되기는 어렵겠지만 겉껍질만 까고 속껍질째 조리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도합 한 시간을 물에 담아 끓이는데 알이 뭉개지지 않는 것도 놀라웠다. 대체 어떤 식감일까? 밤조림에 대한 후기를 보니 유독 '껍질이 쫀득하다'는 이야기가 눈에 띈다. 그리고 세 달은 숙성해서 먹어야 제맛이라는데.... 아니, 어떤 군자가 밤조림을 세 달 씩이나 안 먹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일까. 의문에 쌓인 채로 만들기를 시작했다. 과정은 복잡했지만 냄비 가득 완성된 밤조림을 보고는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밤에 미쳤어도 설탕에 조린 밤을 빠르게 먹어치울 순 없겠지.
그로부터 세 달 뒤인 오늘 나는 스스로를 군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냉장실에서 세 달 묵은 보늬밤조림을 유리그릇에 세 알 꺼내 담았다. 아주 조금 깨물어 씹어도 입안이 풍족해지는 단맛. 세포막에 당분이 스며들고 스며들다 마침내 한몸이 되기로 결심하고 달라진 식감은 놀랍다. 퍽퍽한 나무 심지 같던 속껍질은 마치 젤리 같고, 수분이 빠진 알맹이는 만든 직후보다 단단하게 수축되었다. 세 알을 먹고 충분했다. 더 먹으면 혈당이 높아질까 걱정스러운 40대가 되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기다릴 수 있게 하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하는, 참으로 군자에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밤 까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이 다음 가을에도 밤을 사다가 마음껏 먹고 밤조림도 해두어야겠다. 실망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좋아하면서도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맛있는 것을 벌레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자고, 썩은 밤보다 썩지 않은 밤의 갯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올 한해를 보내자고. 모처럼 희망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군자의 음식이 다시금 군자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