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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연 Dec 28. 2021

달아도 괜찮아, 생강 밀크티

자꾸만 생강이 좋아지는 게 어쩌면 생존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들이닥치는 한파 때문에 집안 곳곳에 냉기가 고인다. 따뜻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으면 어깨가 훅 떨린다.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고 나면 바닥은 곧 훈훈해지는데,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내 손은 품에 안은 유탄보가 무색하게도 얼음장 같다. 예전 같으면 곧장 이불로 향하고 말았을 텐데, 한국인으로 수십 년을 살면 저절로 터득하는 바가 있다. 바로 겨울을 견디는 내공이다. 


일어나자마자 물을 끓여 따뜻한 물을 한 잔 느긋하게 마시고 아침을 시작한다. 이때 끓인 물은 유탄보에도 들어간다. 뜨끈뜨끈한 물주머니를 안고 책상 앞에 앉으면 추위에 놀랐던 몸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겨울에는 시시때때로 내려가는 기온 때문에 과도하게 각성이 되니까 좀 더 누그러져도 괜찮지. 그런데 한낮을 지나서도 한기가 느껴지면, 그날은 생강 밀크티가 필요하다. 


"연료를 넣어, 당장." 


몸이 명령하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작년에 담근 생강청이 아직 반이나 남았다. 생강 산지로 유명한 봉동에서 직송으로 받은 생강 1kg을 썰어서 생강청 한 단지를 담아 두고두고 먹는다. 요리의 비린 맛을 제거하거나 생강의 향을 입히는 용도 외에는 주재료로 사용한 적이 없다. 하지만 밀크티를 몇 번 끓여 먹고 나면 남은 반 병도 훌쩍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작은 냄비에 우유를 붓고 생강청을 넉넉히 넣어 중불로 가열한다. 우유가 끓을 정도로 온도가 높아지면 불을 끄고 홍차 티백을 넣어 5분 이상 우린다. 홍차를 안 넣어도 맛있지만 넣으면 더 맛있다. 생강 밀크티는 맵고 개운한 생강차와 부드럽고 향긋한 밀크티의 장점을 모두 가진 음료다. 여기에 매운 맛을 더하고 싶으면 처음 우유를 끓일 때 페페론치노 한조각을 넣으면 된다. 매운 고추의 맛과 향은 생강에 가려지면서 한 모금 삼킬 때마다 목안이 화하게 달아오른다. 체망으로 건더기를 걸러내서 컵에는 색이 오묘하게 변한 우유만 남는다. 온갖 것들의 맛과 향이 우러난 우유를 후후 불어 가며 홀짝홀짝 마시고 나면 손이든 발이든 온몸이 뜨듯하다. 다크서클이 짙게 패인 얼굴에도 어느덧 발그레 생기가 돈다. 


식사를 핑계로 고구마와 함께 먹었다. 달달한 밀크티를 아주 달게 구운 고구마와 먹으니 정말 무지 달다. 행복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복잡미묘한 기분이 드는 맛이다. 생강 밀크티는 한 번도 충분한 적이 없다. 늘 부족하다. 그래도 참아야지. 계절이 급변하여 무례하게 들이닥칠 때마다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 것은 오늘 마신 밀크티 한잔, 내일 먹을 국밥 한그릇이다. 끼니마다 먹이를 통해 체온을 조절하고 놀란 몸을 다독이며 추위를 견딘다. 해마다 겨울이면 영하 십도 안팎의 기온을 이겨내야 하는 한국인의 숙명이다. 


내일은 레몬 절임을 넣은 레몬 생강차를 마셔 볼까? 생강청을 넣은 야채 카레를 만들까? 자꾸 생강이 좋아지는 게 혹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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