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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연 May 15. 2023

싫지 않은 것들에 주목하기

싫은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민한 나를 지키는 방법


세상에 싫은 것이 너무 많다. 당장 문밖을 나서면 5분 내로 싫은 것들을 서너 가지 맞닥뜨린다. 건널목을 무시하고 쌩하니 달려가는 오토바이, 횡단보도 앞에서 뿜어대는 담배 연기,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놓은 과자봉지나 음료컵. 이런 것들에 경멸을 느끼면서 시작하는 외출은 늘 조금씩 ‘싫은 것’의 범주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바깥은 불쾌하고, 불온하고, 불안전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을 쉬이 지나치거나 통제할 수 있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고 냄새나 소음 등의 거슬리는 감각을 무심코 흘려보내는 법이 없다.  


무던하고 점잖아 보이는 나의 외적 특질은 사회적으로 도태되지 않기 위한 순응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점잖아 보이기는 쉽다. 느끼는 것을 하나하나 말로 뱉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내면에는 적지 않은 분노와 포악함이 도사리고 있다. 단지 나의 포악함이 내가 싫어하는 대상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할 만큼 하찮은 것이어서 별 소용이 없을 뿐이다. 


이런 사람이 집이라고 편할 것인가. 집 앞 계단을 오가는 발소리에 불안을 느끼고, 걸려오는 전화에 깜짝깜짝 놀라고(무음상태도 마찬가지다), 주차장에서 5분 이상 지속되는 공회전 소음이 신경 쓰인다. 매일 앉는 소파가 불편하고, 매일 베는 베개가 불편하고,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의 높이도 못마땅하다. 오래 관찰한 결과, 내가 겪는 불편은 물건이나 환경의 탓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친 무던함 때문이다. 짚고 넘어가자면, 무던함은 무딤과 다른 말이다. 무던하다는 것은 불편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여 부정적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는 상태이다. 예민한 사람도 무던할 수 있고, 무딘 사람도 무던하지 않을 수 있다. 내 몸과 동선에 맞는 가구를 만들고 망가진 것들을 수선하며 일상을 개선해 나가는 ‘진취적인 모호연’도 나 자신이지만, 지나치게 민감한 나머지 ‘어차피 불편할 것’이라 단정 짓고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나의 일면이다. 불편한 의자에 적응하고, 불편한 베개를 바꾸지 않고, 어쩌다 편안한 날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처럼 예측가능한 불쾌를 잠자코 내버려 둔다. 무던하면서, 조금도 무디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하며 일상에 변화를 도모했다. 책 ‘반려물건’과 ‘반려공구’가 그 결과물이다. 좋아하는 감정에 집중하는 만큼 싫은 것에도 무뎌지기를 바랐으나, 무언가를 좋아할수록 좋은 것과 싫은 것의 감정적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좋은 것은 과몰입하여 가슴이 벅찰 만큼 좋았고(love), 싫은 것은 그것의 존재를 허락하는 세상이 부당하게 느껴질 만큼 싫었다(hate). 이따금씩 나에게 묻는다. “너는 대체 뭐가 문제냐?” 돌아오는 답은 없다. 별다른 희망도 없다. 


이토록 진저리 치게 싫은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을까?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오랜 생각 끝에, 좋은 것과 싫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좋은 것과 싫은 것으로 세상을 양분하기에는 내가 느끼는 감각의 총량이 너무 크다. 둘의 거리가 그토록 멀다면, 그 나머지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그 영역의 것들은 무엇이라 말해야 좋은가? 익숙하기에 새삼 포착되지 않는 그 존재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완곡한 거절이자 거리 두기이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것을 혐오하지 않겠다는 능동적인 의지가 담긴 선언이다. 그에 비하면 ‘싫지 않다’는 생각이 아닌 감각에 가깝고, 미처 발굴되지 않은 영역에 가깝다. 싫은 것에 이유가 있듯, 싫지 않은 데에도 아주 개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한다. 너무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서, 싫지 않은 것들에 낱낱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이 감각해 보기로 한다.  


포악하고 분노 많은 내가 그럭저럭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않으려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도 단순히 우연이나 행운에 기댄 것은 아닐 테다. ‘싫어하는 나’로부터 ‘싫지 않은 나’를 지켜내고자 애쓴 결과에 가까울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꾸준히 싫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하며, 나의 민감한 감각을 저주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싫은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민한 나를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까?



다음 편 예고) ‘스팸 전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리 없이 타고 있는 모호연의 멘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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