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환생> 을 읽으며..
인생은 참 다사다난하다.
즐거운 일이 있는가 하면 또 고통의 연속이다.
사실 내가 원해서 내가 태어난 게 아니고,
내가 바랐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닌데...
갑작스럽게 내던져진 삶에서 나는 때때로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한다.
나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이며, 나는 왜 많은 종 중에 하필이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일까를 생각한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살아온 것 같다.
그치만 남들이 보기에는 잘 살아왔던 삶일 수 있어도
대관절 '잘' 살았다의 '잘'이라는 건 누가 정하는 것이란 말인가.
강남에서 태어나, 8학군을 다녔고, KAIST를 나와서, 시총 1위의 대기업을 다니고 있는 삶?
그러나 이런 글 몇 줄에서 뭇 사람들이 떠올릴 편견들의 편린들을 생각하면,
내 삶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는 건 정말 못할 짓이다.
나는 그런 상투적인 이미지와 편견을 보기좋게 빗나가는 사람이니까.
저 시계열 속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 사이사이를 켜켜이 쌓아온 나라는 사람을 어찌 저 한 줄로 다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시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게 낫지 않나.
난 그저 어느 한 곳에 머무르기보다는 늘 옮겨야만 하는 사람,
그럼으로써 인생을 최대한 다양하고 넓게 살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이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그런 점에서 지나왔던 순간들에 후회는 없다.
내 삶에 후회가 있다고 한다면, 뭔가를 했던 후회는 없고 뭔가를 하지 않았음으로 인한 후회만 있다.
그러나 인생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픔같은 게 있는 것만 같다.
이 자리를 떠나면 다시는 이 자리로 오기 어렵겠구나..하며 생의 모든 순간에 이별을 달고 산다.
그리고 이별은 슬프기 마련이다.
나는 태생이 유목민이다.
어릴적 접했던 <토끼와 거북이> 동화를 떠올리며,
그저 묵묵히 거북이처럼 걷다가 끝나버리면 너무도 아쉬울 것 같은 삶에 대해서,
남들보다 빠르게 헐레벌떡 달려온 인생을 이제는 토끼처럼 나무 밑에 쉬면서 관조해본다.
내가 갈 길이 정말 거북이와 함께 가야하는 저 길이 맞는지도 따져보고,
주변 경치를 둘러보면서 꽃의 감동과 낙엽의 우수에 젖어보기도 하고,
또 다른 길을 걸어보면서 세상엔 참 여러 길이 있구나를 몸소 느껴보기도 하고,
밤에는 꾸역꾸역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과거에서 온 별빛을 바라보기도 하는 그런 것들.
아이고, 돌이켜보니 거북이처럼 살라는 옛사람들 말은 다 거짓이구나.
토끼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렸다.
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에 고결하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마주하고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시간.
유목민처럼 나는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왔다.
아마 거기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더라도 이전의 그 때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지나온 시간의 나는 더이상 내가 아닌데, 사람들은 종종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일시한다.
우리는 그저 순간만을 살아내는 존재일 뿐인데 말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아 그래 내가 살아있었지하며 떠올리다가, 밤에 다시 눈을 감을 때 자기 자신마저 잊듯이.
오늘의 나는, 오늘을 살아내느라 또 한 겹이 쌓여버린 나는
어제와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여자친구가 내게 소개해준 시 하나가 있다.
여기에 그 시를 소개한다.
<슬픈 환생>
-이운진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 준단다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 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 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이 시를 읽고 나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여러 상념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조금 정리가 되고 진정이 되어 머리가 명료해지고 나서는,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봤던 작품 중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던 그림이 떠올랐다.
귀스타브 기욤Gustave Guillaumet 의 <Le Sahara> 다.
알제리와 북아프리카에서 그림을 그렸던 그는 사하라 사막의 그림을 이렇게 그려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서쪽 지평선 끝에 행상 무리가 보이고,
우리의 바로 앞에는 죽은 낙타 한 마리가 있을 뿐이다.
난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감정을 잊지 못한다.
<슬픈 환생>을 처음 읽었을 때 가만히 있었던 그 순간이 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림에서 나는 외롭게 삶을 마감한 낙타가 되기도 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갈 길을 떠난 저 행상이 되기도 하고,
그저 야속하게 저물어가는 태양이 되기도 하고,
언제든 내게 오라며 받아줄 준비가 돼있는 사막이 되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그림에 담아낸 화가가 되기도 했다.
사막과 죽음이라는 소재는 우리에게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 같다.
시인은 시에서 개를 인간의 전생으로 묘사한다.
전생같은 걸 믿지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사막 한 가운데로 데려다놓고
그저 서글픈 감정을 스멀스멀 불러일으키는 시다.
어느샌가 눈가가 촉촉해진 것 같기도 하다.
짧은 몇 줄 안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서글픈 단면이 읽힌다.
개의 꼬리와 맞바꾼 인간성 안에는,
태양과 바람과 은하수로 대변되는 순수함을 잃어버린 아니,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처연함이 담겨 있다.
마침내 인간으로 살면서 거짓말도 하게 되고 외로움과 슬픔과 허무를 느끼는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거짓말에 능숙해지고 외로움에도 익숙해지고 슬픔에도 무뎌지는 그런 순간도 온다.
꼬리를 자르며 슬픔으로 축복했던 주인의 마음 속을 상상해본다.
그 슬픔 속에는 어떤 더 깊은 감정이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퍼했을까.
기르던 개가 죽어서?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긴 하지.
환생 후에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에? 그래, 슬픔의 원천은 어쩌면 연민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마주했어서일까? 그저 꼬리를 자르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
뭇 사람들은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거라고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슬픈 환생>은 슬픔을 말하면서, 동시에 인생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삶. 환생 후의 삶.
인생의 참 맛을 알려면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몸에 좋지만, 마음의 힘을 키우는 것은 슬픔이다.
-마르셀 프루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