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그냥 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오리는 이전에 백조의 무리에 속해본 적이 없으니.
매일 백조들과의 공통점을 찾으며 마치 이제야 자신이 있을 곳에 있게 된 느낌을 받았다.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꼈고 존재의 이유를 찾은 듯했다. 오리는 백조들과 함께 겨울이 되면 멀리 날아가 조개를 잡고, 물고기를 잡고, 연못에서의 한가로운 시간을, 물에 떠있는 순간을 즐겼다. 매일이 신났고, 매일이 아름다웠다. 오리는 이제 땅을 걷는 것보다 하늘을 날고, 물 위를 떠다니는 시간들이 익숙해졌다.
늘 오리의 깃털을 칭찬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주었으며 작은 일에도 행복하게 웃었다. 물고기를 잡지 못한 날에도 내일을 기대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 세상은 그들이 가진 깃털만큼이나 눈부시게 빛났고, 깨끗했고, 순수했다.
오리는 쉽게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오리와 비슷한 또래인 작은 백조와 오리를 무리에 받아준 우두머리 백조, 오리를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처럼 보듬어준 엄마 백조가 그중 제일이었다. 오리는 그들에게서 처음으로 우정과 신의, 사랑을 배웠다. 그의 곁을 지켜주는 세 존재들이 있어 그의 세상은 충만했다.
여전히 오리는 기분은 다른 백조들의 미묘한 눈짓 혹은 작은 몸짓에도 금세 수그러들었으며, 그렇게 한번 가라앉은 기분은 며칠간 풀리지 않았다. 그럴 리 없을 거야, 아무 의미 없을 거야 되뇌다가도, 늦은 밤, 고요한 밤, 깜깜한 밤, 잠이 들지 않는 밤이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런 기분을 겪고 나면, 오리는 이상하리만큼 다른 백조들을 따라 하곤 했다. 평소에는 먹지 않던 조개를 따라먹고, 가지 않던 저 멀리 호수까지 다른 백조들을 따라 헤엄쳐가곤 했다. 갑자기 자신의 깃털만 더 작고 볼품없이 느껴졌고, 깃털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모든 시간을 바쳤다. 그렇게 깊고 어두운 시간을 겪을 때, 오리의 불안을 제일 먼저 눈치채는 것은 늘 작은 백조였다.
작은 백조는 늘 오리의 칭찬을 해주었다. 네 깃털이 작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어느 백조보다 윤기 있고 하얗다고 해주었다. 다른 백조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해주었다. 그 누구도 네가 다르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고, 네 깃털을 작다고 얕잡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오리는 그 말에 구원받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리는 자신의 ‘작은 깃털’을 곱씹었다. 작은 백조의 끊임없는 조언에도 ‘그래서 결국 내 깃털이 작긴 하구나’,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네가 내 친구여 서가 아닐까’, 따위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면 불안이 확신이 되어 우울해지곤 했다. 항상 오리의 우울을 눈치채는 것은,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백조였다.
우두머리 백조는 늘 다른 백조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두머리인 만큼 아는 백조들도 많았고 오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백조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른 백조들이 겪었던 아픔의 역사와 현재의 고민, 해결의 방식을 우두머리 백조의 시원한 말투로 재미있지만 장황하게 늘어놓곤 했다. 마지막에는 항상 모두가 너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해결책을 제시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오리는 그 말에 구원받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리는 다른 백조들의 '현재'를 곱씹었다. '그 현재'를 가진 백조들과 자신의 다름을 비교했다. 그리고는 '역시 출발이 달랐어', '나는 여전히 오리인 거야', 따위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면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곤 절망과 함께 깊은 슬픔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오리의 슬픔을 달래주는 것은, 엄마 백조였다.
오리의 불안과 우울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면서도 오리가 먼저 표현해주길, 말해주길 기다리는 엄마 백조는 엄마 백조는 오리의 슬픔에는 항상 먼저 다가갔다. 엄마 백조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먼저 묻는 법도 없었다. 그저 맛있는 저녁을 앞에 놓고 시시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재밌지 않니? 하며 조용히 눈을 맞출 뿐이었다. 다른 행동은 없었다. 그저 오리가 잠들기 전에 한번 꼭 안아줄 뿐이었다.
오리는 늘 깊은 어둠에 빠졌다가도 어느 순간 괜찮아지곤 했다. 아무 일 없는 듯, 다시 행복한 오리로 돌아왔다. 친구 백조와 밤새서 수영하며 놀고, 우두머리 백조와 멀리까지 나가서 사냥을 하기도 했다. 엄마 백조와는 가끔 싸웠지만 늘 눈을 맞추고 밖에 다녀온 이야기를 한참 떠들었다.
그러나 문득 다시 깊은 밤이 찾아오면, 오리는 다시 그 모진 생각들을 힘든 시간들을 겪어내야 했다. 잔뜩 웅크린 채로, 그 긴 밤들을 긴 시간들을 견뎌내야 했다.
오리의 곁에는 끝까지 모두가 남아있었을까?
혐오의 표현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말들이 혐오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혐오의 표현에 상처 입고 스러지고 있다. 그리고 상처는 오래간다. 특히 보이지 않는 상처는 아물었는지, 흉터가 남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어 살피고 매만지지 못한다. 그렇게 마음의 상처는 덧나고 흉측해진다.
혐오의 세상에서, 우리는 분명 한두 번쯤 누군가에 의해 상처 입었고, 마음의 상처를 매만질 새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잊을 수 있었겠지만 누군가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상처가 흐려져 사라질 때까지 기억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고 끝없는 자기 검열의 삶 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아기 오리는 오리 무리에서 벗어나 본인이 속할 곳을 찾았다. 본인이 속한 사회 안에서 친구와 멘토, 엄마와 같은 사회적 관계를 맺었고, 행복할 일만 남았다. 그렇지만 결국 행복해지지 못했다. 어렸을 적 겪었던 차별의 경험은 쌓이고 쌓여 생각의 방식을 바꾸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변화했다. 행복한 세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가 스스로를 괴롭히도록 한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은 외부에서 오는 것일까, 내부에서 오는 것일까?
스스로를 괴롭히는 질문은 세상 사람들의 눈일까,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검열하는 눈일까?
이 글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리인, 친구 J에게 바칩니다.
- 때로는 네 작은 백조이자, 우두머리 백조이자, 엄마 백조가 되어주고 싶었던 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