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세르카스 『살라미나의 병사들』
“2억 인구의 미국인들이 독감주사를 맞기 시작하면 접종 다음날 2300명이 뇌졸증을 일으키고 7000명이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백신을 맞든, 맞지 않든 통계적으로 예상되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오에 접종 받은 사람이 그날 밤 뇌졸중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연관 짓지 않을 수 있겠나? 전후관계 때문에 인과관계의 혼동이 오게 될 수밖에 없다.” 1976년 미국의 예방의학자 한스 노이만이 변이형 돼지독감에 대한 전 국민 예방접종 시행을 목전에 두고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오십여 년 전의 예방의학자가 예견했던 우려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만물백신설’에 의료인들이 고통 받기는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런 때에는 언론의 역할이 무척 아쉽다. 코로나19 시기 내내 ‘팬데믹’보다 ‘인포데믹’이 위험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질 낮은 정보들이 횡행했다. 백신 공급에 차질을 빚을 때면 백신이 없어서 죽겠다고 외치고, 백신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백신 때문에 죽는다고 외친다. 부분적으로 이런 현상은 미디어의 다변화가 가져온 필연이라 할지라도 혼란스러운 국면에 기성언론이 제 역할을 다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이미 우리는 온라인 커뮤니티나 블로그, 국민청원 등에 올라온 글이 정치한 교차검증 없이 기성매체를 통해 기사화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해왔다. 일선에 있는 의료인 중 한 명으로서 그런 기사들을 볼 때마다 아득해진다. 역병은 균이나 바이러스로부터 시작되지만 그에 이어지는 환란은 언제나 소문에서 야기됐다는 점을 떠올리면 암담해지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사실’과 ‘진실’에 관한 오랜 논의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전후관계가 곧 인과관계가 될 수 없듯, 사실도 곧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진실과 무관하게 사실을 전달할 때 그 사실은 어느 한쪽만의 사실, 그러니까 아주 약간의 사실이 될 뿐이다. 반대로 사실을 은닉하거나 왜곡한 채 진실을 가장하여 전파한다면 그것은 프레임 씌우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사실과 진실 간의 긴장관계는 저널리즘의 오랜 화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소설들이 탄생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비에르 세르카스가 쓴 『살라미나의 병사들』(김창민 역, 2010, 열린책들)을 보자. 이 소설은 스페인에서 사실과 진실이 경합하던 시기인 2002년에 처음 발간됐다. 1975년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고서 스페인 정치권은 2년여의 협의 끝에 과거사를 침묵 속에 묻어두기로 결정한다. 흔히 ‘망각협정’이라 불리는 이 협의는 프랑코 시대에 자행된 잔학행위에 면죄부를 주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과거사 청산 움직임의 영향으로 스페인에도 ‘기억의 시대’가 도래했다. 2007년 10월 ‘역사기억법’이 스페인 의회를 통과하기 5년 전에 출간된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소설이 프랑코 국민파 정권을 절대악으로, 그에 저항했던 공화파를 절대선으로 그리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외려 탈이념적인 화자를 내세워 혼돈의 시간 한가운데로 몰아넣는다.
공교롭게도 소설의 화자는 기자인 동시에 소설가다. 소설은 신문 편집장이 화자에게 한 유명작가를 인터뷰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시작된다. 화자는 인터뷰 도중 작가의 부친인 산체스 마사스의 기이한 경험을 전해 듣는다. 산체스 마사스는 프랑코 독재정부에서 장관까지 올랐던 국민파의 거물 파시스트였다. 내전을 준동하고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던 그가 전란 중에 공화파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다. 국민파의 승리가 다가오자 공화파는 포로들을 죽이기 시작했는데, 총살대에서 숲으로 도망친 마사스를 추적하던 한 공화파 병사가 그를 발견하고도 못 본 척하는 바람에 그는 극적으로 생환하게 된다. 내전이나 역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화자는 단지 ‘극적’이라는 이유로 이 사실을 취재하는 데 몰두한다. ‘그 병사는 무슨 생각으로 적의 요인이자 전 국토를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전범을 살려줬을까?’ 이 의문을 풀어내기만 한다면 한 편의 그럴싸한 소설이 완성되리라 예감했기 때문이다.
화자는 마사스에 관한 특집기사를 작성하고, 이를 토대로 소설을 쓰는 동안 전범에게 동화되어 간다. 노년에 이른 마사스는 정치와 이념의 무상함을 느끼고 시인으로서, 작가로서 평범하게 죽어갔는데 소설가인 화자는 이 평범함에 이입한다. 역사 수정주의자라는 비난에도 취재를 멈추지 않던 화자는, 그러나 마침내 마사스의 정반대편에 있었던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되자 그때까지 쌓아올린 사실의 더미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 ‘사실’은 바로 마사스를 살려준 병사, 안토니오 미라예스다. 일생을 반독재와 자유에 몸 바쳤을 무명의 전사는 조국이 아닌, 프랑스의 요양원에서 외로이 늙어가고 있다. 마사스의 평범한 노년에 이입했던 화자는 철저하게 망각된 역사의 희생자를 대면하고서 그 평범함이 평범하기는커녕 희생자의 무덤을 밟고 선 특혜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화자는 미라예스에게 묻는다. 왜 그때 산체스 마사스를 살려주었느냐고.
이에 대한 미라예스의 대답은 이 소설의 백미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말하고 싶은 부분은 결말을 구성하는 다음 장면이다.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노병은 화자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부탁은 단순하다. 당신을 안아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포옹하는 이 장면에 이르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소설적 진실’이다.
진실에 이르는 길은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을 리 없다. 단지 사실을 모으기만 하다보면 미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사실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기 마련이며 하나의 진실로 모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이야기를 짓는 작가들은 인과성이 명확한 가상의 시공간을 창조하여 소설적 진실로 향하게끔 만든다. 이는 이 소설 속의 화자 역시 기자인 동시에 소설가이지만 결국 그가 쓰는 글이 기사가 아닌, 『살라미나의 병사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화자의 선택은 역설적으로 언론이 정도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현실에 언론이 존재하고, 언론이 현실에 개입하는 한 이 소설이 내포한 중요한 교훈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헤매는 자가 결국에는 길을 잃지 않는다’라는 오래된 교훈을 말이다.
(중앙일보 기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584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