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미술의 ‘따라잡고 넘어서기’
전시명: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작가진: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 48인
따라잡고 넘어서기
따라잡고 넘어서기. 러시아 예술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척박한 얼음의 땅인 러시아에서 야만에서 벗어나 문화를, 나아가 예술을 향유하기 시작한 역사는 매우 짧다. 문학, 무용, 음악 등 모든 러시아 예술은 유럽 예술의 뒤늦은 모방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여 19세기경 서구를 뛰어넘는 독자적 아이콘들을 탄생시킨다. 문학이 대표적인 예다. 18세기 이전의 시베리아에는 시, 소설, 드라마란 존재치 않았다. 하지만 18세기 초반, 유럽 문학에 대한 모방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작가들을 2000년간의 서구문학을 100년만에 따라잡는다. 그 다음의 100년 간엔 낭만주의 및 리얼리즘의 새로운 문학사조를 이끌며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걸출한 대문호들을 배출한다. 발레도 마찬가지다. 발레의 종주국은 프랑스이나 오늘날 우린 발레와 함께 루이 14세가 아닌 차이콥스키를 떠올린다.
1. 모방하기: 도상과 색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미술 역시 서유럽의 상징주의, 후기 인상주의, 그리고 표현주의의 모방에서 시작했다. ‘푸른 장미’ 그룹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초 러시아 상징주의 화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본질을 상징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존재하지 않던 혁신적 표현을 추구했고, 당시 서유럽 미술의 최신 경향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후기 인상주의 및 표현주의 작가들 역시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주관적 시각을 작품에 담았다.
전시는 프세볼로트 울리야노프의 '붉은 말'이라는 상징주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해당 작품은 폴 냑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점묘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하늘을 나는 붉은 말은 러시아 이콘화와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천사나 영웅을 실어 나르는 존재, 즉 세계에 변혁을 가져오는 힘을 상징한다고 한다. 작품이 제작된 1917년은 2월 혁명에 이어 10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전복된 해이다. 당시 백작 출신이었던 울리야노프는 귀족계층을 향한 민중의 폭동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여생을 머나먼 타지에서 보내야 했다. 말은 혁명을 향한 꿈과 자신에게 닥친 갑작스런 비극을 동시에 표출하는 도상이다.
또한 캔버스를 자세히 보면 나치 문양이 보인다. 본래 성스러움과 빛을 상징하는 도상이었으나, 후대에 나치에 의해 변용된 것이다.
2. 따라잡기: 러시아적 미의식과 여성 작가들
러시아 작가들은 점차 모방에서 나아가 독립적인 미학을 발전시킨다. 차르 시대에 소외됐던 하층 계급의 미술을 부활시킨 신원시주의, 광선의 비물질적 실체를 다양한 색채로 재현하는 광선주의가 대표적이다.
한 여인의 나체가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솥뚜껑처럼 크고 두꺼운 손과 발, 풍만한 육체, 무릎 아래 남은 양말 자국까지. 일말의 부끄러운 기색 없이 여유로운 표정이 인상적이다.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비너스 연작 중 하나인 '유대인 비너스'다. 미의 여신 비너스를 너무나 태연하게 제목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서구 미술계가 주장하는 미의 관념을 비틀어 조롱한다.
왜곡된 형태와 대담한 색채는 러시아 전통의 이콘화와 루복(민속 판화)의 흔적이다. 그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반자인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추수꾼들'에도 루복의 특징이 적용됐다. 나무를 파낸 듯한 테두리 선의 묘사가 그것이다. 이처럼 러시아 전통미술의 소박함을 복원한 사조를 ‘신원시주의’라 한다. 신원시주의를 표방한 이들 부부를 선두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시대가 본격 추진된다.
20세기 초에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아마조네스'(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전사로만 이루어진 전설적인 부족)라 불리는 여성 예술가 6인이 등장한다. 곤차로바도 그 중 한 명이다. 이번 전시에선 곤차로바의 ‘추수꾼들’ 외에도 로자노바의 '비구상적 구성', 우달초바의 '부엌', 포포바의 '회화적 아키텍토닉스'를 관람할 수 있다. 남성 미술가의 뮤즈가 아닌, 독자적인 예술 세계의 주체로서 활동한 여성들. 이는 러시아 미술 사조의 독자적인 특질이다.
3. 나아가기: 추상회화와 절대주의
유럽 모더니즘을 자기화하여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킨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추상으로 꽃을 피운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즉흥, 인상, 구성이라는 세 단계를 거치며 발전했다. 전시에선 즉흥 단계에 속하는 세 개의 연작을 만나볼 수 있다. 4년의 시간 차를 두고 차례로 그려진 세 작품은 칸딘스키의 화풍 변화를 잘 보여준다. 사랑에 빠진 그의 들뜬 심리가 느껴지는 밝은 색채와 대상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유추 가능한 반추상이 적용된 1909년의 즉흥 No.4이 가장 초기의 그림이고, 1차 세계대전의 시대상을 반영한 어두운 색채, 완전추상이 돋보이는 1917년의 즉흥 No. 217이 가장 후기의 것이다.
말레비치는 칸딘스키의 표현주의적 추상마저 뛰어넘는다. 회화를 현실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 것이다. 바로 절대주의다. 절대주의라는 이름은 ‘최고의 상태’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인간 정신이 창조한 순수한 예술미의 극치를 지향하기 때문. 그는 자연을 모방하지 않으면서 회화의 영역에 남기 위한 최소 조건으로 도형을 사용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사각과 원의 조형이 곧 작품이 되는 것이다.
절대주의가 일으킨 파문은 거대했다. 인간의 창작물에 ‘절대’의 수식어를 붙이는 건, 곧 인간의 예술적 창조력이 자연의 창조력과 동등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일단 당대 사람들이 인간 존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이해해야 한다. 오랜 기간 인간은 신이 창조한 자연의 일부, 즉 신의 피조물로 취급됐다. 그런 인간이 향유하는 예술이란 기존의 자연을 모방, 혹은 변형하는 것에 불과했다. 대상 그대로가 아닌 화가의 주관적 감상을 담는 표현주의 및 인상주의조차 그림의 근본적 소재는 언제나 자연이었다. 즉, 인간의 예술은 언제나 자연이라는 신의 1차 창작물에 기반한 2차 창작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절대주의는 자연에 존재치 않는 구상을 꾀한다. 최초로 현실의 실물에서 온전히 분리된 1차 창작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에서, 독립적인 창작을 행하는 또다른 창조주로 전환한다.
4. 넘어서기: 혁명의 예술, 구축주의
젊은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순수예술에서 나아가 혁명과 전쟁의 시기에 영감을 얻어 구축주의를 완성한다. 구축주의란 마르크스의 '생산 활동로서의 예술'이라는 실용적 미학을 실천하는 사조로, 예술을 발명처럼 취급한다. 구축주의자들은 기술과 예술의 조화로운 결합을 통해 오늘날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생산적 미술을 창시했으며, 20세기 현대미술은 물론 건축, 사진, 디자인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에선 구축주의를 대표하는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와 엘 리시츠키를 만날 수 있다. 구축주의의 선구자, 블라디미르 타틀린을 전시장 내 다큐멘터리로만 접할 수 있는 건 아쉽지만, 로드첸코와 엘 리시츠키의 작품들로 충분하다. 로드첸코의 초기작 '비구상적 구성'은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여러 색채 도형을 치밀하게 배치한 점이 눈에 띈다. 역동적인 동시에 긴장감을 자아내는 배치는 훗날 광고 디자인, 제품 디자인, 가구·인테리어 디자인에 고스란히 활용된다. 영상을 통해 소개되는 로드첸코의 파리 디자인 박람회에서의 '노동자 클럽' 역시 20세기 디자인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서구 회화의 모방에서 시작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은 추상 회화 및 절대주의, 구축주의를 통해 20세기 디자인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혁명 정신으로부터 발전한 아방가르드 예술은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스탈린 체제에서 내부적 핍박을 받게 된다. 외부적으로는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에 가로막혀 서양미술사의 변방으로 내쫓기며 국가 안팎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오늘날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은 서구 중심적 미술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혁명의 예술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모방에서 나아가 자신만의 것을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주도한 러시아 미술의 저력을 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