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에 온 지 세 달이 지났다
1. 네덜란드 TMI 3
1) 네덜란드에는 네발 자전거가 없다. 네다섯 무렵의 꼬마들도 모두 두발 자전거를 탄다. 국민 수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은 자전거국답게 그 조기교육이 훌륭하다.
2) 자전거에 관한 TMI 또 하나, 이 나라는 자전거용 스마트폰 거치대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전거를 탈 때 두 손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두 손을 주머니에 꼽고도 능숙히 자전거를 타는 이들은 그저 주머니에서 손을 빼어 폰을 쥐면 되기 때문에, 왜 자전거용 스마트폰 거치대가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한다!
3)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평균 키가 가장 높은 국가이다. 이 장신국의 미술관에서는 다른 관람객의 시야를 가릴까 작품 앞에서 굽실댈 필요 없다. 내 정수리보다 한층 높은 시야로 편안히 관람하는 후방의 그들… 덕분에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오래 머물 수 있다.
2. HER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사랑했을까? 분명...
즐거운 데이트를 마친 연애 초의 사만다와 테오도르, 테오도르는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다가 사만다에게 이제 그만 내일 보자고 말한다. 사만다는 먼저 자, 조금만 더 당신을 보다가 카메라를 꺼도 될까? 잠든 당신을 보고 싶어. 라고 답변한다.
대중 가요에서 물리도록 반복되는 사랑의 정의들은 이 장면만큼 사랑을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다. 사랑은 잠든 상대를 바라보는 거야. 정지한 덩어리가 가만가만히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그 무력한 광경을 눈에 담기만 해도 흐뭇한 마음이야.
그러고 보니 난 기숙사 창문 너머로 잠든 이 단지의 밤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다. 새벽 3시 즈음 침대로 가기 직전, 창문을 슬쩍 열어 혹여 이 새벽에도 잠들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나, 인적을 살피는 그 시간이 낙이다. 벌써부터 한국에 돌아가면 이걸 못한다고 생각하니 섭섭하다. 분명…
3. 버퍼링
유럽 학생들은 과제를 대충 하는 것 같으면서도 마감 직전에 척척척, 한 치의 buffering 없이 깔끔히 끝내버린다. 나는 한참 전부터 과제에 매달리기 시작하지만… 고민, 또 고민뿐이다가…결국 실행에 도입하는 시점은 그들과 비슷하다.
4. 세탁기
나에게 나의 집을 갖는다는 건 나의 세탁기를 갖는다는 것이다. 빙글 돌아가는 세탁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좋다. 세탁기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세탁기의 작동음은 소음이 분명하지만,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만은 그 덜컹거림마저 즐거운 배경음악이 된다.
내가 살고 있는 기숙사는 주방과 화장실이 공용인데, 12명의 플랫메이트들이 화장실에 있는 하나의 세탁기를 공유한다. 때문에 12분의 빨래를 담당하는 우리의 세탁기는 쉴 새가 없다. 낮에는 워낙 세탁기 차지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밤잠 없는 난 주로 새벽에 세탁기를 돌린다. 빨래를 들고 어둑한 복도를 지나 공용 화장실로 향한다. 복도의 조명은 자동 센서인데, 내가 아주 살금히 움직이면 이 둔한 장치는 인적을 놓치고 여전히 복도는 캄캄하다. 이 때 나는 기계마저 말끔히 속여냈다는 생각에 못내 뿌듯해한다. 그리고 세면대 옆 세탁기에 빨래감을 차곡히 넣는다. 구글의 사진 번역을 켜서 네덜란드어로 쓰여진 세탁기 버튼을 해석해 적절한 세탁 버전을 선택한다. 어제는 '구김 적게', '물 온도 20도씨'를 골랐다. 그리고... 도통 이 세탁기는 세재 서랍이 어딨는지 석달 차인 아직까지도 모르겠어서 세재를 빨래감과 함께 세탁통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작동 버튼을 누르면 세탁기 안에 물이 차고 통이 돌아간다. 통이 돌아가는 걸 세면대 앞에 쪼그려 앉아 3분 정도 관람한다.
5. 단어 찾기
난 오감 중 무엇에 가장 민감할까? 확실히 시각은 아니다. 그렇다기엔 미술관만 가면 잠이 쏟아진다. 촉각, 후각, 미각은 덜떨어진 정도는 아니라지만 썩 훌륭하지도 않다. 굳이 꼽자면 청각일까? 이 곳의 정적이 좋다. 그 정적이란 소음의 부재가 아닌 한국어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언어의 무지가 가져오는 군중 속의 고독이 나쁘지 않다. 그런데 가끔씩, 아니 종종 네덜란드어 중 튀어나오는 영어는 싫어. 나의 어중간한 지식을 자꾸만 실험해야 하는 것이 싫다. 내 교환학생 시절의 유흥에 이 부족한 영어 실력이 장애물이 된다면 치열한 공부 후 후딱 치워버리고 맘 편하게 노는 것이 맞을까? 아니다. 사실 뭘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반년이란 그저 즐기기만 하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인걸. 결국 답은 하나. 뻔뻔해져야 하는데… 뻔뻔해지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그 누구도 뻔뻔해지는 법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다! 뻔뻔함이란 그저 자신의 마음가짐을 일컫는걸까? 국어사전에 ‘뻔뻔하다’를 쳐보니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염치없이 태연하다’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나의 부족한 영어 실력이 부끄럽고 염치없는 일인가? 1초 전까지만 해도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또 부끄러운 일이 맞긴 한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짜증스레 견뎌온 학습의 시간을 떠올리면. 아무튼 ‘뻔뻔하다’가 부정적 어감으로 자주 쓰이는 단어라는 게 기분을 더욱 텁텁하게 하므로 의연해지고 싶다고 말을 바꿔본다. 그러나 의연하다는 조금 더 굳센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표현 같다. 나처럼 혼자서 볼 일기에서나 영어 울렁증을 하소연하는 인물에게 쓰기엔 과분하다. 최종적으로 태연하다라는 단어에 정착하기로 한다. ‘마땅히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할 상황에서 태도나 기색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예사롭다’ 왜냐하면 정의문 중 저 ‘마땅히’라는 첫 단어가 마음에 쏙 들었다. 맞아. 이건 내가 마땅히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할 상황이다. 나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두려울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 잘해내는 중이라고 믿기로 한다. 그래서 속마음은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는 와중, 배와 목에 힘을 딱, 태도나 기색만큼은 예사로워 보이도록 한다. 이것이 내가 태연해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