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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스푼 Jan 27. 2022

주변의 부자들

제 1 편 : 월급쟁이가 다 그렇지 뭐

십 년 전 어느 날,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세금이 모자란데 천만 원만 말일까지 해줄 수 있냐? 3개월 뒤에 갚을 게”

“어쩌지? 미안한데 나도 여유가 없는데.”

그렇게 시작된 전화는 서로 세상 푸념하는 이야기로 넘어갔고, 그런 중에 친구가 말했다.

“너도 십 년 넘게 직장 생활했는데 그런 여유가 없구나.”

“월급쟁이가 다 그렇지 뭐”라고 둘러대긴 했는데

전화를 끊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지인들에게 빌려줬다가 못 받은 돈이 얼마나 됐던가?라는 생각부터 나는 왜 돈이 없는가?

그중에 가장 큰 고민은 내가 한 말이었다.

‘월급쟁이가 다 그렇지 뭐’

아니, 월급쟁이는 가난한 것이라는 자조와 패배감은 무엇인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직장에서 인정받으려고 야근에 주말근무에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는데 돌아온 건 가난이라는 것이 순간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의 나이가 이미 삼십 대 후반을 달리고 있었고 결혼도 못했으니 가난을 이해 못 하는 것 이상으로 초조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각성을 계기로 돈을 버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중요한 삶의 변화다. ‘열심히 일하자’에서 ‘돈을 벌자’까지 생각을 바꾸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단순한 말이지만 나에게 그것은 양에서 질로의 변화를 의미했다.

십 수년이 지난 현재의 나를 계산해보면 그래도 발전적인 변화가 많았다. 흔히 말하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이 늦었지만 결혼도 했으며 제법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돈으로만 보면 십여 년 시간이 그 전 삼십여 년 시간보다 알찼던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수준에 올라서니 또 다른 수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신기하게도 가난할 땐 부자가 주변에 없었다. 좀 살만 해지니 부자들이 주변에 보인다.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그들만의 내공이 있었고 재벌가의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경제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변에서 돈 빌려 달라는 부탁도 가난할 때 더 많이 들어봤던 것 같다. 살만 해지니 그런 부탁이 없다. 반대로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는 부자들이 더 늘었다. 그래서 술자리 방담으로 곧잘 하는 말이 생겼다.

“가난한 사람이 왜 가난한 줄 알아? 주변이 가난해서야.”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못 봤다. 다들 주변에 돈 빌려주고 못 받은 기억이 하나씩은 있는 나이니까.


그렇다. 가난은 환경이 가난한 것이다. 혼자만 있다면 배는 고플지 언정 가난하다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혼자만 잘살아서는 불안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환경에서 벗어나 좀 더 안정적인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선험자들의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비록 스스로는 이재(理財)에 밝은 재테크 강사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먹고 산다는 실증적 사실을 뒷배경에 깔고, 주변의 부자들을 만나 그들의 부자 된 실천적인 이야기를 기록해두고 싶었다.


우선 이야기하려는 주변의 부자들을 정의해 본다.

첫째, 금수저 물고 태어난 재벌이나 부잣집 도련님 같은 사람들은 아니다. 부자도 태어났지 부자가 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우디 귀족을 만난다 한들 그들로부터 배워 실천할 것이 크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부자가 아니다.

둘째, 대단히 많은 돈을 벌거나 가진 사람도 아니다. 당장 이번 달에 회사를 그만둬도, 혹은 가게를 닫아도 여생을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 규모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러니까 각자의 부의 기준도 다른 것이다. 1억이 있으면 매월 100만 원씩 8년 6개월을 살 수 있다. 생활비 100만 원이 그 기준이라면 1억을 가져도 부자라는 관점이다.

주변의 부자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등장하겠지만 이들은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가 가장 중요한 주변 부자들의 기준이다. 아버지를 생산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첫째로 거론된 금수저들은 당연히 주변의 부자가 될 수 없다.


생산수단을 갖는다는 것.

중학교 사회과목에서 배웠던 것 같다. 생산의 3요소.

대부분 머릿속에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은. 그렇다. 토지, 노동…. 그리고 자본.

이것들을 생산 수단화하는 것, 즉, 돈벌이 수단화하는 것이 생산수단을 갖는 것이다.

이 중에 당신은 무엇을 가졌는가?

아마 대부분 “노…동?”

이라며 말꼬리를 흐리겠지만 그것조차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정확히 정리하자.

생산의 3요소는 토지, 노예, 자본이다.

그러면 뭘 가졌는가?

가진 것이 없거나 달리 표현하면 노예화된 스스로를 가졌을 것이다.

생산의 입장에서 노예는 기계와 차이 없다. 기계는 낡아가고 노예는 늙어간다. 만약 노예화된 스스로를 가졌다면 당신은 지금도 늙고 있다는 점을 알면 된다.

즉, 나머지 생산요소에 비해 개별 단위적으로는 유한하다. 땅이 갑자기 바닷속으로 사라지기 힘들고, 권총 든 은행강도가 내 계좌를 털어가는 경우도 발행하기 힘들다.(최근엔 보이스피싱으로 털릴 가능성이 높긴 하다.) 기껏 가진 게 세 가지 중 가장 약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세상은 늘 새것으로 바꾸려는 경향이 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퇴사, 돌려 말하면 명퇴가 그것이다. 말이 명예퇴직이지 명예를 느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노동은 혹은 노예는 고용주를 위한 생산요소지 본인을 위한 항목이 아니다. 따라서 생산을 위한 기본 요소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속고 있다. 누가 속이는지는 몰라도 속은 것은 맞다. 그리고, 또 속고 있는 단어가 있다.


‘중산층’

OECD 기준으로 중산층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중산층은 한 나라의 가구를 소득순으로 세운 다음에 중위소득의 75~200% 까지의 소득을 가진 집단을 말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2021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서 가구 순자산 중간값이 약 2억 2500만 원이므로, 1억 7천만 원(상위 58%)에서 4억 5천만 원(상위 29%) 정도가 중산층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수치적인 중산층은 29%이다.

그런데, 2020년 한 증권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59.4%가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치와 심리 사이 30%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건 단순히 자기만족이다. 과거 가난에 비해 이 정도면 먹고살 만하지 않냐는 ‘기저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내가 중산층일 것이라고 내가 나를 속인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암묵적으로 속이고 속는, 어쩌면 착오일 수 있지만 중산층을 중상층이라고 알고 있는 착오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산층이 왜 중산층인지 생각해 본 사람은 많이 않을 것이다. 아직도 글로 적어보라면 중산층인지 중상층인지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다. 정확히 알아 두자, 대부분 중상층이 아니며 더더욱 중산층도 아니다. 중산층은 중상층(中上層)이 아니며 한자로 중산층(中産層)이라고 쓴다.

무산계급(無産階級)이라고 들어 봤을 것이다. 유산계급(有産階級)도 그러하고.

그 중간계급은 뭘까? 그렇다. 중산계급(中産階級)이다. 우리가 계급이란 말을 싫어하니 그것을 층(層)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면 유산계급(브르주아, bourgeoisie), 가진 게 없으면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 어정쩡하나마 가지고 있으면 그게 바로 중산계급(small bourgeoisie)이다.

무슨 공산당혁명에 나오는 같은 단어들 같지만 그것은 우리 교육과 인식의 문제일 뿐 중산층의 의미는 유산층과 무산층 사이의 중간층이다. 살짝 벗어난 이야기지만 계급과 계층의 차이에 대해 국민윤리 시험에 나왔던 것 같다. 계급과 계층의 가장 큰 차이로 계층은 계층 간 이동이 가능하지만 계급은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자. 사회의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사다리 걷어차는 행위는 계층이동을 막는 대표적인 표현인데 계층과 계급의 차이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했다면 중산층이 아니라는 씁쓸한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근면이라는 말도 그렇다. 부지런하다는 말이 좋은 말 같긴 하지만 근면은 부지런할 근(勤)과 힘쓸 면(勉)의 조합이다. 이런 단어를 교실 칠판 위에 태극기와 같은 라인으로 액자 안에 걸었고, 근면의 친구는 성실이었고, 새마을 운동 3대 정신이 근면, 자조, 협동이었고,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값진 것이라는 어른들의 칭찬에 떠밀려 업혀서 라도 학교에 갔던 기억들 속에 우리는 성장했다. 근면과 성실은 좋은 말이지만 이 말을 열심히 일한다는 것에 한정하려 한다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누구일까? 나를 생산수단으로 쓰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의 근면이 그의 생산력이니까. 즉, 근면은 근로노동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목적 없는 근면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나를 위한 근면, 나를 위한 성실함으로 언어를 다시 세팅할 필요가 있다.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 더 이상 세상의 무한긍정 언어들에 속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이 글을 함께 할 것이다. 앞서의 내용이 씁쓸하다면 스스로의 위치를 알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부자 되기 위한 이웃 탐방의 여정을 같이 할 준비가 된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경기 남부에 사는 성실납세 수상자를 만나볼 예정이다. 우리가 찾던 주변의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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