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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산책 Jun 16. 2020

초코파이는 잔혹하다

초코파이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다

얼마 전 마트에 서 아이와 과자를 골랐다. 아이는 평소와 다르게  초코파이 박스를 집어 들었다.  다양한 맛의 초코파이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빨간색 포장에 "情"이라는 표시가 있는 "오리지널"이었다. "아빠는 내 과자 먹지 마" 이 한마디에 나는 그 옆에 있는 다른 "몽**통"이라는 과자 박스를 집어 들었다. 초코파이는 내 기억 속에 처음에는 달콤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가 그리고 잔혹한 기억으로 이후는 다시 달콤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몰래 초코파이 하나 뺐어 먹고 내 과자 "몽**통"하나를 채워 넣어 놓아야겠다. "초코파이"를 보니 군대 시절이 생각났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에서 찾은 군대 후임도 생각났다.. 군생활이라니. 초코파이는 군생활의 시작과 끝이다.


이 크로와상을 한 번에 다 먹어야 된다고 생각해 보라


군생활의 시작 그리고 초코파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무궁화호를 타고 다시 버스, 군용 트럭을 타고 자대 배치를 받아 강원도 땅을 밟았다. 강원도는 놀러 오는 곳이었는데 군대 생활을 강원도에서 할 줄이야. 인사과에서 대기를 하다 나를 데리러 온 선임을 따라 *중대 *소대 *반으로 배치되었다. 긴장의 연속. 숨도 쉬지 못하고 긴장된 삶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온 주말 오후, 바로 위의 선임은 PX에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선임은 가장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어봤다. 먹고 싶은 것은 엄청 많이 있었지만 선임이 사주기 위해 물어봤을 것이고 그래서 적당한 가격에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말했다. 바로 초코파이에 콜라라고 답했다. "초코파이에 콜라". 훈련소에서 훈련병 시절 종교 행사를 가면 초코파이에 콜라를 나눠주었다. 그 초코파이에 콜라가 일주일의 모든 훈련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지는 달콤함이었다. 훈련소에서 달콤한 음식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일주일 만에 맛보는 초코파이의 맛은 세상 어느 음식보다 맛있었다. 그리고 콜라까지 주는 날이면 초코파이에 콜라가 이렇게 궁합이 좋은지 몰랐다.

자 이제 초코파이 하나에 콜라 한 캔이면 나는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선임이 계산하고 있는 것은 초코파이 한 박스에 콜라 페트병 하나였다. '돌아가서 함께 나누어서 먹으려고 이렇게 사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PX의 테이블 위에 초코파이 한 박스와 콜라 페트병 하나가 올려졌다. 그리고 다정한 말투로 '다 먹어'라고 말했다. 설마 초코파이 한 박스를 다 먹으라는 말은 아니겠지? '먹다가 남기면 가지고 가거나 하면 될 거야'하고 생각하고 '감사히 먹겠습니다'하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선임은 하나도 먹지 않았다. 심지어 콜라도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별도로 캔 음료수 하나와 만두,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 만두가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초코파이를 3개 정도 먹었을 때 더 이상 먹기는 힘들 듯했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배가 부른 표정을 지었다. 남은 초코파이를 쳐다보고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장난하냐?"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초코파이 한 박스와 콜라 페트병 하나를 정말 다 먹어야 된다는 의미였다고?'  초코파이의 맛은 5개를 넘어가면서부터 더 이상 맛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행히 콜라가 있어서 어떻게든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렇게 일요일 오후 시간 PX에서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앉아 꾸역꾸역 초코파이 한 박스와 콜라를 위 속에 집어넣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저녁밥을 먹으러 가야 될 시간이 왔다. 군대에서 밥을 먹지 않을 자유도 없다. 의무적으로 밥을 먹어야 된다. 그리고 밥을 조금만 떠서 담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또 5시와 6시 사이 저녁밥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날 저녁 청소시간이 되기 전 화장실로 달려가서 먹었던 모든 음식을 강제로 토해냈다. 다행히였다. 강제로 토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 토해내지 않았다면 그날 저녁은 엄청 괴로웠을 것이다. 식은땀이 흘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할 수 있는 것은 강제로 입안에 손을 넣어 토를 하는 것이었다.



잔혹한 초코파이 피하기

그 뒤로 주말에 종교행사를 가면 초코파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초코파이를 일부러 받지 않거나 그래도 초코파이를 챙겨주면 옆에 있는 동기를 줘버렸다. 동기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도 고마워했다. 초코파이를 두 개나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동기는 행복했을 것이다.


최근에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버찌"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어렸을 때 말입니다. 나는 버찌에 미쳐있었어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화가 났습니다. 나는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지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지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처넣었어요. 배가 아파 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P.283)


"버찌" 나는 한동안 그 초코파이 한 박스를 "가혹행위"라고 생각하면서 지독하게 그 선임을 미워하고 증오했다. 그러다가 "그리스인 조르바"의 "버찌"부분을 읽으면서 그때 그 초코파이 한 박스가 생각났다. 그 선임은 나에게 어쩌면 "욕구" , "요구", "욕망"에 대한 "라캉"의 정의를 그 초코파이 한 박스로 알려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군대라는 닫힌 사회에서 어떻게 "식욕" 그리고 "달콤한 것"에 대한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지 알려준 것인지도 모른다.  순진한 생각이지만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봤을 때 초코파이 2개 하고 콜라 1캔이라고 이야기를 했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욕구가 요구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오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확하게 욕구가 요구로 전달이 되고 그 요구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족이 될 때 욕구와 요구는 "0"의 관계로 "욕망"은 생기지 않는다. 욕망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욕구와 요구의 뺄셈이다.


"욕망"을 알기 위해서는 양극으로 가볼 필요가 있다. 극과 극의 양극으로 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고 누려보고 가득 채워보고 반대로 모든 것 없는 결핍의 상태도 누려보는 것이다. 결핍의 상태에서 욕망했던 것들의 소중함과 함께 불필요함도 느끼게 된다. 그 양극에서 스스로를 견뎌보면 버텨보면 좀 더 나를 알 수 있다. 어쩌면 군대는 나에게 그런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극과 극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었다.


다시 달콤함으로

군 생활에서 상병이 되고 내가 선임이 되었을 때 다시 찾은 일요일 종교행사에서 초코파이를 먹었다. 그동안 멀리하던 초코파이의 그 기억은 사라졌다. 물론 그 초코파이의 맛은 훈련병 시절 먹었던 그 초코파이의 맛은 아니었다. 이제 내가 먹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으러 PX로 갈 수 있다.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상병이다. 그러니 초코파이가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달콤함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맛이다. 머릿속에 기억된 달콤함과 그 결핍의 상황에서 다시 그 맛을 경험했을 때 머릿속에 기억된 달콤함 이상의 달콤함으로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지금 아이의 초코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훈련병 시절 그 초코파이의 맛을 기억하면서 베어 물었지만 머릿속에는 살찔 생각에 얼른 절반을 짝지에게 건넨다. 혼자서 살이 찌면 억울하지 않은가? 그리고 함께 초코파이 먹었으니 산책 나가야 된다고 설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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