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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Dec 06. 2023

좋은 학벌, 좋은 재능

학교 2

졸업생 예준이가 찾아왔다. 졸업 후에 지금까지 무얼 하고 살았는지, 예준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준이는 두 달을 공부해서 토익 900점을 넘겼다고 했다. 학원도 인터넷 강의도 없이 책으로 독학으로만 달성했다고 한다. 예준이는 방학 동안 여러 나라를 돌며 여행 브이로그를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다고 했다. 지금은 영상을 삭제했지만, 당시에 많은 사람이 영상을 시청했다고 한다. 또 예준이는 손 글씨 대회에 나가 2등 상을 받았다고 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손 글씨에 관심 많은 아이였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예준이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며 좋은 글귀 하나를 적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Things will get better’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문구가 나에게로 왔다.    

 

졸업 후 예준이의 행보는 실로 놀라웠다. 예준이는 끼가 많고 다재다능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성장하고 있는 예준이가 기특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준이가 학교에서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학생이었나? 갑자기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답을 말하자면, 아니었다. 공부를 그리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고, 대학도 수도권이나 국립대로 가지 못하고 지방대에 입학했다. 아무튼 성적으로 크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특출나게 우수하지 못한 성적 때문에 예준이는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렇게 끼와 재능이 많은 학생이었는데도. 나조차도 예준이와 개인적으로 수다를 떨며 친근하게 지내긴 했지만, 예준이가 자신의 관심사를 얘기할 때 그만하고 공부하라고 잔소리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아이가 졸업 후 끼와 재능을 분출하는 모습은 기특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하다. 학생들 대부분이 ‘대학’을 위해 고등학생 3년을 올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렇게 올인하여 얻을 대학을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부’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도 누군가는 ‘전부’를 갖지 못해 좌절한다. 예준이처럼 실제로는 다양한 끼와 재능을 가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대학은 단순히 지식과 유능함의 척도가 아니라 학창 시절의 인내와 성실함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대학=확률적으로 높은 (끈기, 성실함, 책임감)’이라는 것이다. 내가 만약 한 회사의 대표라면, 입학 성적이 낮은 대학 출신의 사람을 채용하는 것보다 입학 성적이 높은 대학 출신의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앞으로 일을 진행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말이다. 나 또한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소위 높은 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아무튼 학창 시절 적어도 3년 동안은 힘든 공부를 버텼다는 것이고, 똑같은 것을 가르쳤을 때 적어도 이해를 못 하고 헤맬 정도로 지능이 낮지는 않다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이런 사실이 학벌을 중요시하는 지금의 풍토를 만드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성실함과 책임감의 척도가 반드시 ‘좋은’ 대학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단순히 학교 공부에 재능이 없어서, 또는 대입 전략을 잘 못 짜서 등의 다양한 이유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은 당연히 감탄스럽고, 멋있다. 사람들이 쉽게 가지지 못한 것을 노력 끝에 성취한 사람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좋지 않은’ 대학을 나온 사람을 무시할 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대학만으로 이 사람이 유능하지 못하다, 혹은 성실하지 못하다, 혹은 책임감이 없다고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열심히 노력했고, 성실하고, 끈기도, 책임감도 뛰어난데 학교 시험의 형식과 맞지 않았거나, 또는 공부에만 유달리 재능이 없었거나, 또는 훌륭한 대입 전략을 만나지 못했거나, 환경이 열악했던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 어쩔 땐 종종 좋은 대학이 성실함과 책임감의 척도가 되지 못하는 사례를 접하기도 한다. 좋은 대학이 그저 좋은 혜택과 순종의 척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대학은, ‘확률적으로’ 성실함과 책임감을 나타낼 뿐이다.


어떤 사람의 끼와 재능을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판단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그 대학이 나의 끈기와 성실함, 책임감을 증명하는 자격증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내가 끈기 있고 성실하다는 사실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어진다. 어쨌든 대학은 확률적으로 성실함과 책임감을 나타내기 때문에,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게 단연 베스트다. 앞으로의 많은 일들이 수월해질 테니까. 하지만,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좋은 대학,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대학은 나의 끼와 재능을 증명하는 척도가 아니며, 입시에 실패했더라도 나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 수없이 나의 끈기와 성실함, 책임감을 증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그래서,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 좌절하지 마라. 너희의 끼와 재능은 대학이 아니라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입시에 성공한 학생들에게는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다. 축하한다. 우리가 그 끼와 재능을 무던한 노력으로 증명해야 할 때, 너희는 그 노력을 명함 하나로 생략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하게 하고 싶은 말은, 입시에 실패했든 성공했든 모두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의 끈기와 책임감은 대학에 따라 증명해야 하거나 증명될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대학 하나로 내 모든 것이 증명될 수는 없다. 나의 재능과 능력은 이후에 계속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학과 상관없이.




예준이가 왔다 간 이후,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 넓어진 것도 같다. 학교에는 공부를 잘하는 훌륭한 학생들이 있다. 공부는 못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끼가 있는 뛰어난 학생들도 있다. 공부에 지금 당장 흥미를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관심 분야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열정적인 학생들도 있다. 학교는 이 수많은 능력을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재단해 버리지만, 교실에는 시험으로 증명되지 않는 다양한 능력들이 넘실댄다. 내가 이 다양한 능력을 발견하고 응원해 줄 수 있는 교사가 되었으면 한다. 입시에 주눅 든 학생들에게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부디 모두가 자신의 끼와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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