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털뭉치들을 사랑하는 이유, 그리고 늘 미안한 이유.
개를 좋아한다니 자연스럽게 개가 나오는 영화도 많이 볼 것 같지만 실은 개가 나오는 영화에 대해서는 살짝 저어하는 면이 없지 않다. 자칫 영화가 슬프게 풀려서 개가 죽기라도 하면 그 이후 스토리와 관계없이 대성통곡하게 되기 십상이라 그 점이 염려되어 아예 그럴 위험이 없는 영화 아니면 쉽게 손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조심스러운 나라도, 영원한 어른 아이이자(영화 "빅") 툴툴대면서도 결국 해줄 건 다 해주는 츤데레(영화 "터너와 후치")면서 반려 배구공 윌슨을 목놓아 부르는 생존 전문가(영화 "캐스트어웨이")인 "톰 행크스"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애플 TV에는 콘텐츠가 많지 않아서 톰 행크스가 주인공에 개와 로봇, 그리고 디스토피아적 미래라는 소재들이 결합한 이런 드라마까지 Skip 하면 선택지 자체가 별로 없다.
길을 재촉하는 동안 신생아 로봇은 무서운 속도로 주변과 핀치에 대해 학습한다. 이야기꾼 로버트 저매키스 제작에 왕좌의 게임 감독이 함께 한 물건답게 소소한 이벤트 모두 재밌지만 그걸 다 주어 섬길 필요는 없을 듯. 여정 중 핀치는 자신이 만든 창조물에게 태어난 목적을 뚜렷하게 강조한다. 그게 왜 나한테는 그리 슬프면서 공감되었을까. 생명의 근원이었던 태양이 오히려 모든 유기물을 태워 죽이는 전복된 세상에서 언제 죽을지 예상할 수 있는 한 생명에게는, 생존에 유용한 존재보다 유용성 관점에서는 오히려 짐만 되는 '필요성' 없이 그냥 존재하는 개가 오히려 더 절실한 그 감정. 같은 배우의 캐스트 어웨이 속 윌슨(배구공)에 투사된 그 사무치는 외로움에 대해 이미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던 나는 그 감정을 호출하여 개와 핀치, 그리고 로봇 제프의 관계를 바라본다. 핀치에게 그렇게나 소중한 개인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부르기보다 그냥 개(The dog)라고만 호칭하는 이유가 궁금해진 로봇이 왜 개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냐고 묻는데, 핀치는 이 세상에 이미 유일한 개 'The dog'가 왜 따로 이름이 필요하냐면서도 이름이 없진 않다면서 "굿이어(Good year)"란 이름에 얽힌 과거 이야기를 해준다.
아비규환이 끝나지 않은 종말의 초기, 아이도 여자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 다른 인간을 만나면 먼저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는 상황. 아직 대형상점에 물건들이 남아있던 종말 초기의 어느 밤, 핀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나선 아이와 엄마를 발견했지만 엄마가 아이에게 다른 사람을 보면 먼저 쏘라고 당부하는 것을 듣고 핀치에게는 그들을 해칠 의사가 없었지만 이들과 마주치지 않는 것만이 서로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운한 모녀는 다른 생존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모녀의 카트에 담겼던 물건들도 빼앗긴다. 핀치는 그 지옥에서 숨죽인 채 이 모든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두 모녀를 돕기 위해 다른 생존자를 죽여야 할까? 그 이후에 두 모녀가 핀치를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인간이라면 그 상황에서도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않나? 딜레마 지옥 속에서 삽시간에 벌어진 비극적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죽은 아이의 배낭 안에서 낑낑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안에서 발견된 것이 바로 '굿이어'. 그 후로부터 핀치는 다른 인간을 마주치지 않는 것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거대한 전자레인지가 된 북미 어느 공간에서 가족도 없이 이 개를 먹이고 돌보는 것으로 그의 삶을 이어왔다.
이런 주인공의 원형은 오시이 마모루의 2001년작 "아발론"의 프로게이머 애쉬도 있다. 그녀가 목숨을 건 위험한 가상현실 워게임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미래 세계에서 귀한 '진짜 고기와 야채'로 개를 먹이기 위해서였는데 결국 나중엔 그 개가 실존했느냐 애쉬의 조작된 기억이었는가로 연결된다. 공각기동대로 하늘 높이 추앙받다가 괴작 아발론으로 추락했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세계에서 개가 상징하는 바는 좋은 레퍼런스로 남았다고 생각한다.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함께 할 견종으로 가장 믿음직한 녀석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전설이다"의 셰퍼트가 아닐까 싶은데 안타깝게도 아래의 장면 때문에 그 뒷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할 정도로 많이 울었다. 그래서 개가 죽는 영화는 피해 다니는 편. 샘의 죽음 이후 윌 스미스에게는 돌볼 인간 아이가 둘이나 생기는데 그 장치에 대해서도 사실 온전히 공감하고 지지할 수 없었다. 개 한 마리에 의지하는 주인공보다는 인류의 미래-아이-를 돌보는 쪽이 덜 어두워서, 희망적이어서 각본 작업도 그렇게 이뤄졌을 것이라 예상은 하지만 그렇다고 개는 꼭 죽었어야 했나.
대체로 어두운 SF의 미래 전망 중에서 그나마 덜 끔찍한 깁슨의 미래를 닮아있고 특유의 유모어와 비장미, 스타일까지 겸비하여 비교할 대상이 없는 카우보이 비밥은 칸노 요코의 대단한 음악과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일본 애니메이션. 그런데 엊그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실사판이 되어 나타난 것을 보았다.(일본에서 실사화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원작과는 조금 다른 설정의 웰시코기 "아인 Ein"의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위의 두 영화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인간이 개를 사랑하는 이유가 등장한다. 미래 어느 시점 지구 게이트가 무너지고 대참사가 벌어질 때 인간 상류층은 동족인 인류보다 자신들의 개를 구하는데 공간과 비용을 썼고 그 덕분에 가족을 구하지 못한 분노한 생존자는 복수를 위해 부자들의 개를 납치하여 살해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었어도 무자비한 악인이 아니었던지라 죄 없는 동물들을 죽일 수 없었다. (복수조차 실패한 자신에게 절망하며 자살하려는 도중 경찰에 의해 사살. 나쁜 XX들!) 생존이 절박한 세상에서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의 소유는 과시적 소비의 전형이 될 수도 있다는데 소름이 돋는다. -요즘 세상에서는 아닌가? 아프간하운드를 데리고 낮 시간 산책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경제적 신분에 대해 바로 견적이 나오지 않나?- 그런 점에서 베블런의 이론은 정말 오래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시작했더라도 이후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단정할 수는 없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결혼은 20세기에 들어 조건 없는 숭고한 사랑으로 성공적인 신분세탁을 했지만 사실 인류의 역사 시기 내내 압도적으로 긴 기간 재산과 권력을 유지하는 교환가치에 기반한 제도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식도 마찬가지. 그래서 여럿을 낳아 자신의 노후를 유지할 유망한 투자의 기회를 늘리고 가능하다면 모두에게 성공적인 삶을 제공하려 노력하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우선순위에 의해 합목적적으로 투자를 했던 것이 먼 과거도 아니고 사실 근본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그 원리에 의하여 돌아가고 있다.
이유나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인간 이성과 심성의 발전단계에서 질적으로 다른 국면이다. 작거나 크거나, 어떤 색깔, 어떤 품종의 털뭉치건 일단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그 이유를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려면 굳이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이유 중에 삶의 쓸모, 실용적인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돈도 많이 들고, 털 날려서 청소도 귀찮고, 밤낮으로 사고 쳐서 고달프고, 아프기도 자주 아파서 마음 쓸 일도 많고, 낑낑거리는데 이유를 알 수 없어 마음 졸이고, 그 모든 일방적 배려에도 늘 뭔가 잘 못해주고 있는 것 같아 빚진 듯 미안하게만 만드는 이 존재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리고 아파서 보듬고 산다.
불편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어서 어떤 부류의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런 경험을 못하고 죽기도 한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둘둘 감아 넘어가기 망정이지, 가족이어도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남만도 못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만나 한 번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버리면 멈출 줄 모르는 털 뭉치들에 비해 자기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맞아들였던, 혹은 그런 계산조차 없이 자기 욕망에 충실한 쇼핑을 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과 이유가 소멸하면, 또는 벽덕스런 마음이 뒤집히면 나만을 의지하던 그 아이들을 버린다.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개들 중 다른 작은 개들은 모두 임종까지 함께 하였으나 슬프게도 깜숙이만은 아버지 사업실패와 여러 불운이 겹친 끝에 집을 비우면서 결국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거나 얘기를 꺼내면 죄책감에 눈물을 흘린다. 당시 10살 남짓한 나이에 사이즈도 집안에서 기르기는 좀 컸던 깜숙이는 어디 가까운 친지에게 입양도 못되고 떠맡기듯 아는 이의 건너 건너 친지가 한다는 시골 과수원 지킴이 개로 넘겨졌다. 나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고3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으니까. 그 후로 10여 년은 너무나 고생스러운 가정사에 독립하기까지 내 코가 석자라 깜숙이의 안부를 묻거나 떠올릴 새도 없이 살았다. 어느 날 깜숙이 생각이 떠오른 시점에는 이미 개의 평균 수명을 훌쩍 넘겨 살아있기를 기대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문득 그 과수원은 실재하는 곳이었을까를 떠올리면 참담했다. 제발 사실이었기를.... 깜숙이에 대한 미안함인지 뭔지, 그 후로 혼자 독립하고 상황이 되어도 쉽게 동물을 들일수 없었다. 결혼 후에도 누군가를 기를 자격을 얻기까지 나에게는 나름의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 있었다. 나를 오롯이 책임지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 전까지 함부도 가족을 늘이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며 그것은 자식이건, 반려동물이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다른 종류의 털뭉치들을 만나 기른 지 13년을 넘긴 지금도, 나에게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도 못할 깊은 신뢰를 보여줬던 털뭉치 친구들을 떠올리면 그때는 너무나 미숙하고 무지하여 잘못했던 모든 것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난다. 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너무 모자란 나, 함께 사는 동물은 인간에게 늘 미안한 감정을 일깨운다. 내가 그들에게 충실하고자 하고, 이해하려고 할수록 미안함은 깊어지기 마련이다. 핀치가 굿이어에게 지닌 강한 책임감은 그가 인간이어야 할 순간 인간적이지 못했던 죄책감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모두 각각의 생존이 달린 백분 이해 가능한 순간이었음에도.) 절체절명의 위기였다지만, 자기 기대만큼 사람답지는 못했던 모자라고 불충분한 자신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존재, 그러나 비난은 없이 오로지 신뢰와 사랑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는 마음에 나 또한 깊이 공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