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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 저 Feb 21. 2022

밀프렙에 대한 몇 가지 개인적인 기록들. (4)잡담 편

조그만 도시락 박스 속 큼지막한 이율배반.

 보통 우리는 평소 사용하는 대부분의 단어를 대화나 글을 통해 자연스레 체득하는터라 특정 단어를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는지가 불명한 경우가 많다. 반면 랜덤한 몇몇의 단어에 대해서는 그것을 처음 맞닥뜨린 순간이 뚜렷하게 기억나곤 한다. (물론 개중에는 기억과 실제가 다른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나에게도 몇몇의 단어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행여'라는 단어는  지오디의 어느 노래 가사로 알게 되었다. 당시 앨범 테이프의 가사지를 보며 친형에게 행여와 여행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아마 오타 정도로 생각했었나 보다. 정작 지금은 그 노래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보다 흔하게는, 만약 당신도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영어나 한문 같은 외국어를 배우면서 오히려 반대로 관련된 우리말 단어나 관용어를 알게 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몇 년간 한문 학원을 다녔다. 친구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학원이었는데 나와 다른 친구가 그 학원에서 한문을 배우고, 나와 친구가 그 다른 친구의 어머니에게 영어를 배우고, 친구와 다른 친구가 우리 어머니에게 수학을 배웠다. 모계에 의한 독특한 순환적 형태의 품앗이 재능기부 아니었던가 싶다.

 각설하고, 그때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 사자성어를 배우는 순간, 매우 매력적인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이유는 단순했던 것 같다. 단지 그 단어가 주는, '모순'이라는 비슷한 단어보다 더 설명적이면서도 소위 그럴듯한 뉘앙스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보통 이율배반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그 모순적인 상황이 누구에게나 환영받을만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가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법률용어로도 철학용어로도 쓰였다는 것은 그것의 함의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가치중립적이든 간에 그러한 상황 자체는 필연적이면서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세상을 보다 쉬이 이해하려는 방식 중 하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이율배반적임'을 유념하는 것이다. 가끔 지금 속해 있는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얽혀있어 어떠한 결정 내리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조차 피곤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심지어 개인적인 호불호에 대한 문제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면 단지 모든 것이 어떤 면에서 그렇기도 하고, 동시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당장 그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거나 판단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인 범퍼가 생기는 것 같다. 비슷하게 이해가 안 가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생기면,  그냥 세상이 이율배반적이라 또, 나도 이율배반적이라 그런 거라고 넘겨 버리면 끝이다. 굳이 그것에 대해 이해하거나 알아내려는 노력 없이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듯 말이다. 누군가는 회색분자나 양비론적이라거나 혹은 진실을 찾지 않으려는 기만이라 할 수 있겠으나 세상에 정답과 오답 딱 두 가지의 옵션만 존재하는 문제가 얼마나 많겠나.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옳고/그름 혹은 호/불호가 아닌 그 사이 넓은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옳기만 한 것도 그르기만 한 것도 없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지점들이 반드시 있고 그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스펙트럼적 선택지를 열어 두는 것은 편견이나 속단으로부터 날 자유롭게 해 주고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더 다양하게 생각할 여지를 주어 객관적인 판단에 도움을 준다. 내가 작금(이 단어도 학문 학원에서 배웠다.)에 유행하고 있는 MBTI에 대해 스스로 경계하는 점도 그러하다. 개인적으로 MBTI를 인간관계의 엄청난 해법처럼 맹신하지도, 타로나 별자리, 혈액형별 성격 같은 것 같이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검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네 글자로 나타나는 성격에 본인을 끼워 맞춰 생각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것 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향적이면서도 외향적이고 계획적이면서도 즉흥적인데 말이다.


 대단히 사소해 보이는 밀프렙에도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얼마간의 시간 동안 매주 도시락을 만들면서 느낀, 그 소소한 습관에 담긴 두 가지 특성에 대해서 얘기해보려 한다

 

 1. 부지런하되, 또 게을러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밀프렙’이라는 방식 자체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위한 루틴일 것이다. 일주일 중 하루 정해진 시간을 들여서 당장 먹을게 아닌, 며칠 뒤 먹을 한 끼를 준비하는 것이 여간 귀찮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각각의 재료가 떨어지기 전에 구비해 놓아야 하고, 어려운 조리법은 없지만 수 번의 삶기과 볶기를 거쳐야 도시락을 만들 수 있다. 당장의 수고를 감당하고, 이후의 보다 클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에는 노력과 근면함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것은 비단 도시락 싸기 같은 개인적인 문제에만 해당되는 점이 아니다. 금연이나 환경보호에도 비슷한 종류의(하지만 몇 배는 더 큰) 수고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게을러야 할 이유는 또 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보다 부지런한 사람이면, 매일 저녁 다음날의 점심을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혹, 만약 그것보다 더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당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당일 점심을 싸는 것이 더 합당한 선택이지 않을까. 분명 밀프렙이라는 방식은 어떤 종류의 여유로움과 느긋함을 준다. 밀프렙을 하다 보면 몇 가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생긴다. 거기에는 점심을 먹으러 왔다 갔다 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물론 메뉴를 고민하는 그 조그만 수고도 포함된다.

 밀프렙은 말하자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부리는 최대한 나태이자 도시락을 싸고 싶은 나타한 사람들의 최소한의 성실함이다. 주말에는 앞으로 주중에 먹을 점심 식사를 위해 부지런을 떨 줄 알아야 하지만 정작 주중에는 점심 한 끼에 대해서는 어떠한 수고도 하고 싶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밀프렙을 해야 한다.

2. 커다란 지겨움엔 무디되, 조그마한 변화엔 예민한 사람이어야 한다.


 밀프렙을 하는 다른 이들의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보통 (내 상황과 능력 안에서) 밀프렙으로 할 수 있는 메뉴는 크게 두 가지, 샐러드와 파스타이다. 사실 그마저도 두 가지라기보단 그 두 가지 사이의 어떤 한 가지에 더 가깝다. 지난 몇 달간 대략 4달간은 파스타(면서 동시에 샐러드인 것)를 먹었고 2달 정도는 샐러드(이기도 하고 동시에 파스타)를 먹었을 것이다. 지겹지 않냐고? 놀랍게도 아직까지 지겨웠던 적은 아직 없다. 내가 만드는 방식을 앞선 글에 기술했지만 일주일 간은 온전히 같은 메뉴다. 그 속에 담긴 채소나 고기, 파스타면은 물론 그 위에 얹은 소스조차 일주일간은 바뀌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사놓은 재료의 소진이나 만들기 번거로움 같은 실용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이유를 차치하고 나서라도 나는 굳이 매일매일 다른 메뉴를 원하진 않는다. 오히려 같은 메뉴들이 주는 일종의 편안함에 더 이끌린다.  나는 항상 변화를 갈구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반대로 엄청나게 꾸준한 사람도 아니다. 만약 한 달간 정확히 똑같은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면, 이미 실증을 느끼고 지금쯤이면 그만뒀을 수도 있다. 큰 틀에서는 한 가지처럼 보이는 메뉴도 조금 더 살펴본다면 다양하고 미세한 차이들을 찾을 수 있다. 2주마다 파스타 면이 바뀌고, 대략 한 달마다 소스 , 또 몇 주마다 채소들이 바뀌는 식이다. 그러한 각각의 고유한 주기를 가진 변화들이 간섭되면, 거의 매주 다른 구성을 가진 도시락이 된다. 지난주와 이번 주 간 파스타 면에 변화가 있었다면, 이번 주와 다음 주 간 소스가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소소한 변화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그 조그마한 변화에도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것이 나를 지치지 않게, 또 지겹지 않게 만든다.   


 '이율배반'이라는 개념은 나에게는 저 밖의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망원경이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현미경이 되어 주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적인 사고방식은 비유적으로 망원경이나, 현미경이라기보다는 선글라스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마치 태양을 가려주기도 하고, 타인에게  (심지어 거울 보는 나에게도) 자신의 눈을 숨겨주기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식인 동시에 세상을 이해하지 않고도 지내려는 방식에 더 가깝기도 하다. 뭐 아무렴 어떤가. 여전히 세상은 이율배반적이고 내 생각도 옳고도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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