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사진 동호회 출사가 있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미루기만 했었던 출사. 한 달 전에 일정을 공유하고 약속했던 일정이었다. 여러 사람이 한날한시에 모인다는 것, 더구나 날짜가 일요일이라면 성사되기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따는 일 정도. 이번 출사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가뭄에 콩 나듯 했었던 단체 출사가 몹시 고팠던지 다들 의기투합한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던 봄의 하루를 만끽할 수 있었다.
운길산역. 오전 8시 30분.
휴일 주부인 내가 이른 시각에 집을 나서는 것이 왠지 미안해서 인근 전철역까지만 차를 태워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선뜻 모임장소까지 '모셔다 준다'는 남편의 외조로 편하게 약속 시간 전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며 외쳤지! 연예인님 땡큐, 아이러브유. (*연예인님은 남편의 애칭)
운길산역 인근 카페에서 도착 전인 회원들을 기다렸다. 카페 사장님이 친절하게 주문을 받아 주길래 동호인들 단체 사진 한 장 찍어달라 부탁하니 흔쾌히 셔터를 눌러주었다.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사장님, 감사했어요.'
벽에 걸린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발견하곤 반가워서 보고 또 보고.
색을 사랑한 남자, 마티스.
나도 그렇다.
봄이 여물어간다.
익어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길을 나선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참 부지런하다.
휴일의 늦잠을 양보해도 억울하지 않은지
사람들 걸음에
뺑글뺑글 돌아가는 두 동그라미에
경쾌한 속도가 붙는다.
*양수철교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운길산역과 양평군 양서면 양수역을 잇는 철교. 구간은 운길산역부터 용늪 쪽까지이다. 2008년 중앙선이 복선전철화되어 두 구간을 잇는 새로운 교량이 건설되었다. 현재 구 교량(양수철교)은 보도용 나무판이 깔려 자전거도로 국토종주길 중 일부로 활용되고 있다./네이버 발췌
북한강철교(양수철교) 위는 바람이 없었다. 지난번엔 모자가 벗겨질까 꼬옥 움켜쥐고 다리를 건너야 했었다. 알 수 없는 건 여자의 마음만이 아니었다. 건너는 이들의 안부가 궁금했는지 오후의 바람은 거칠게 거칠게 다리 위를 지나갔다.
달리는 자전거족들과 살짝이라도 부딪힐까 조심스레 자세를 잡고
얼른 무엇이든 지나가길 기다리고
내가 구성해 놓은 프레임 안으로 자전거족이 들어오길 한 눈 지그시 감고 가녀린 들숨날숨마저 죽인 채
그날도 카메라를 눈에 붙이고 앉았다 구부렸다 재꼈다를 반복하며 나의 몸은 삐끄덕거리는 깡통로봇이어야 했다.
고공으로 향하는 나의 기분대로 하이키로 하이키로
노출을 맞추고 셔터를 정신없이 눌렀다. (*하이키 촬영-노출을 밝은 쪽으로 놓고 찍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동호인들이 이동했다. 끼리끼리 하니 카메라 들고 폼 잡는 뻘쭘함도 덜했다. 앞서 간 이는 뒤로 처져 있던 이를 기다려 주고 모이면 단체샷 한 장 남기곤 다시 이동. 그렇게 거리가 벌어졌다 좁혀졌다 그러길 수 차례. 배꼽시계가 울리고 나서야 비로소 족적이 한 곳으로 모였다.
같은 사물, 풍경이 있어도 만들어 낸 네모 안 이미지는 어쩌면 그리도 제각각일까. 언제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양수리 쪽으로 무사히 철교를 건너니 자그마한 숲길이 보였다.
'수풀로'생태공원.
양수철교 위에서 본 수풀로 생테공원
내 인생의 봄은 갔어도
네가 있으니
나는 여전히 봄의 사람
너를 생각하면
가슴속에 새싹이 돋아나
연초록빛 야들야들한 새싹
너를 떠올리면
마음속에 꽃이 피어나
분홍빛 몽골몽골한 꽃송이
네가 사는 세상이 좋아
너를 생각하는 내가 좋아
내가 숨 쉬는 네가 좋아/ 나태주 님. 봄의 사람
수풀로 쪽에서 본 철교
모처럼 바람이 좋구나
우리 손잡고 멀리 가자
잡은 손 놓지 말고
멀리까지 가보자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그러면 등 뒤로 잡은 손
숨기고 가야지
그래도 바람이 보고 있어요
손을 잡고서도 그리운 마음
얼굴을 보고서도 보고픈 마음
강물에게나 실어 보내자
바람에게나 날려 보내자
오늘따라 바람 좋은 날
강물도 좋은 날
못 만나는 사이 네가 많이 예뻐졌구나./ 나태주 님. 강변
'수풀로'는 아파트를 지으려다 계획을 수정해 생태공원으로 만들었다는 곳. 결행한 이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후대에겐 값진 선물이 되었다는 것을 이름 모를 그도 알고 있으려나. 개발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들의 거친 비난도 있었을 텐데. 그 고마운 이에게 이제라도 박수를 보낸다. 의도가 좋으니 결과물은 당연히 훌륭했다. 아담한 공원이지만 다채로워 걷기에 편했다. 길고 좁다란 수변길은 두물머리로 구불구불 이어졌다. 아아 두물머리 연핫도그 생각이 났다. 반사적으로 군침이 돌았다. 원조였을 법한 아저씨 가게는 없어졌던데 어디로 갔을까. 개그맨 최양락 씨를 닮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었던 아저씨. 인근 핫도그를 파는 곳이 늘어났어도 그 아저씨 핫도그맛만은 못했다.(입맛은 개인 취향이므로)
아저씨의 레시피대로 만들어진 연핫도그를 다시 먹는 날이 올까. 생각하니 더 먹고 싶네.
수변에 자리한 나무 하나,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 연두빛깔 무리에 하나로 끼어있어도 그 기세가 전혀 눌리지 않았다. 늠름하기 그지없었다. 복사꽃가지 사이로 보이는 철교마저 자태가 남달랐다.
나의 미모도 그러길 빌고 또 빌었는데 에구에구 이생망이다.
수풀로 공원
지난 겨울 순순히 물러나 숨 죽이고 시간을 보낸 나무들이 다시 색을 입고 있다. 닮고 싶다. 그렇게 어른이 되기를 빌어본다. 고운 여자 되어 사랑받고 싶다. 나이 들면서 밝고 선명한 마음의 결이라도 내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렵다면 내게서 향기라도 은은하게 나기를 바란다.
양수리 전통 시장 거리에 즐비한 빨강, 노랑, 연두, 파랑, 초록, 주황 빛깔이 봄볕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키다리 콘크리트 건물 속에 살다가 가끔 이곳을 지나칠 때면 나는 착각 속에 빠진다. 고달프다 아파하는 나를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잠시라도 행복했다. 이곳에 오면 시간은 완행열차를 타고 가듯 그렇게 천천히 움직였다. 조그만 동네길이 사랑스럽고 따스하기까지 했다.
이 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원두를 직접 볶는다는 카페로 들어갔다. 헉 반전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아메리카노가 3,500원이라 그저 그런 줄 알았다. 엔틱스러운 카페 내부. 감각 있는 사람이 주인장임에 분명했다. 주문을 받고 있는 여인, 요들송을 제대로 부를 것 같은 모자를 쓰고 있던 여인이 사장님이었다. 커피 향이 진동을 한다. 아, 좋다. 빨리 마시고 싶어서 '모두 뜨아로 주세요'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찍은 사진을 돌려가며 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리뷰하고. 나의 사진에 대한 어떤 이의 소신 있는 조언으로 그동안 내가 풀어내지 못했던 것이 뚫렸다. 제대로 짚어주고 방법을 제시해 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내 맘이 다칠까 봐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이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더 감사했다.
그러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 첫맛은 시큼하더니 혀 너머 목구멍으로 갈수록 고소한 맛이 잔잔했다. 농도도 적당했고. 카페에 들어서며 이 사람 저 사람 매장 분위기가 좋네요 했더니 사장님도 기분이 업되었던지 맛보라며 직접 구운 스콘을 테이블에 놓고 갔다. 막 구웠다더니 내가 먹어본 스콘 중 제일이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 우유맛이 진하게 나서 물었더니 우유는 아니고 프랑스산 유기농 밀가루와 버터를 넣어서 그럴 거라고 했다. 퍽퍽해서 불호였던 스콘에 대한 나의 취향이 그 시각부터 선호로 바뀌었다. 다른 메뉴들도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내돈내산이 아깝지 않은 매장이었다. 나올 때 '사장님 번창하십시오'라는 말이 무심결 나왔다.
햇살이 좋은 날, 춥지 않아 좋은 날, 휴일인데도 가족을 두고 혼자 나선 나들이길이었다.
내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온전한 나로 시간을 보냈던 그날도,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봄은 진행되고 있다. 이 봄을 다신 만나지 못하겠지.
아직은 겨울이지 싶었는데 봄이 왔다고 좋아라 했다. 빠르게 여름이 왔나 했다. 잠시 따가운 햇살이 헷갈려나 보다. 서운할 뻔했다. 다행이다. 아직 봄이어서.
아쉽게 흘러가고 있는 이 봄을 허망하게 놓아주고 싶지 않다. 아니 내가 허망하게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만났던 운길산역으로 되돌아와 일행은 작별인사를 하며 개인 일정대로 순서 없이 길을 떠났다. 다들 좋았다며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다. 글쎄. 무엇을 하고들 있는지 그들은 다 바쁘다고 하시면서.
시간을 언제 또 만들 수 있을지 알 순 없다. 그러면 어떤가. 혼자라도 즐기면 될걸. 실컷 잡아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