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이 개장되고 어느덧 가장 화려한 시기로 접어든다. 오월의 텃밭은 여왕의 위용처럼 화려하지만 소박하다. 많고 많은 식물 중 심는 작물이 거기서 거기. 왜? 농장주의 눈에 들어 간택된 몇 가지 한정된 모종이나 씨앗을 구입해서 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텃밭의 자태는 광채가 난다. 네모네모스런 바둑판의 형태를 갖춘 생명체가 점점 경이롭게 변해 간다.
모종으로 심은 쌈채류들이 건강하게 자라 얼마 전부터 식탁 위가 풍성하다.
권태롭고 식상한 입맛 앓이에 골골했던 나. 겨우 탈출했다.
별거 아닌 푸성귀와 쌈장 때론 고추장 그리고 밥 한 숟가락 듬뿍 얹어 크게 한 쌈 싸서 입에 구겨 넣고
우적우적 씹는다.
볼이 터지도록.
도토리를 잔뜩 입 안에 물고 있는 욕심 많은 다람쥐처럼,
볼썽 사나운 개구리 투투의 볼따구처럼.
한 입 가득 한 쌈 물고 있는 나의 턱주가리는 풍선처럼 한껏 부풀려진다. 아함.
거기에 고기 한 점이라도 얹어진다면 나의 우악스러움은 기어코 극에 달하고 만다.
같이 식사를 하는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뻔뻔하고 염치없는 식사 자리가 이어진다.
혐오스러워지는 나의 모습에 개의치 않는다.
게걸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한 톨의 밥알이라도 남기지 않겠다는 결의마저 충만하다.
아무래도
나는 한동안 이쁘게 먹는 법을 잊고 살 것 같다.
어쩐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을 하듯이
나의 파종도 점점 섬세해진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이고.
나 또한 텃밭 경작 3년 차, 곁눈질로 농사를 배워 왔다.
이제 그럴듯한 나이롱 농부이다.
훅훅 바람에 날리듯이 씨를 뿌렸더니 밭 군데군데 원형 탈모 현상처럼 싹이 나지 않는 곳이 생겼다.
그래서 고육책을 쓰기로 했다.
그것이 사단이 될 줄이야.
기발하다고 착각한 고육책은 비루한 책략이 되고 말았다.
고놈의 고육책이 나의 무릎을 갉아 먹는 줄도 모르고 쪼그려 앉아 한 알 한 알 씨앗을 땅 위에 놓아준다.
내 무릎으로 통증이 온다. 쿡쿡 쑤신다. 새우등처럼 등이 구부졌다. 애구애구.
많이 아프다.
씨앗을 뿌릴 땅 위에 우선 물을 듬뿍 부어 준다.
삽으로 푹푹 땅을 파내고 엎어 준 후 삼지창으로 고르게 땅을 펴 준다.
씨앗이 발아된 후 뿌리가 잘 뻣어나갈 수 있도록 포실포실한 흙으로 만들어 주기 위한 과정이다.
그리곤 한 알 한 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땅 위에 씨앗을 떨어뜨린다.
씨앗들이 몰리지 않게 반드시 한 알씩 한 알씩.
그 위에 살포시 흙을 덮는다.
두 손 가득 흙을 담아 솔솔 씨앗 위로 뿌린다.
무겁지 않게.
흙 사이로 송송 숨구멍이 보인다.
그 구멍으로 햇빛도 들어가고 물도 들어가고 나의 진한 사랑이 담긴 손길도 들어가고.
이제 매의 눈으로 땅 위를 들여다볼 차례다.
흙 이불을 덮지 못하고 덩그러니 나체로 드러나 있는 씨앗이 있는가 들여다본다.
낱알의 씨앗이 나의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순간이다.
벌거벗은 신생아와도 같은 씨앗은
발아되어 스스로 땅 위로 올라올 때까지 피보호자로 있어야 하며 나와 자연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물 주러 가는 길, 속도가 실린다.
배 고프다 아우성치는 새끼들 입에 얼른 먹이를 넣어주려 정신없이 발길을 재촉한다.
늘 지나가는 길, 미동이 있어도 나는 눈치가 없다.
풀과 나무가 사부작사부작거려도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신호를 보내는데도 나의 무덤덤은 더 단단해진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시간 참 빠르네' 한다.
초록이 다홍으로 변해야 그때 겨우 알아채고 만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이도 이웃,
텃밭 내 구역에 인접한 곳에서 경작하고 있는 이도 이웃.
물 주러 가다 시선이 마주치면
아니 내가 먼저 존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이것만으로도 행복지수는 확 올라간다.
별거 아닌 게 또 나를 살맛나게 한다.
파종 후 발아된 새싹들이 소담한 무더기가 되어 자리를 잡는다.
한 삽 푹 떠서 한 움큼 뽑힌 뿌리들을 갈래갈래 분리해 옮겨 심는다.
어쩌다 필요하다 싶은 이웃에게 분양도 한다. 인심이 말할 수 없이 후해진다.
품앗이처럼 내가 내어준 것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부메랑으로 푸짐하게 돌아온다.
사람의 정, 인정을 가득 담아 내게로 부메랑 되어 훈훈하게 돌아온다.
이웃 밭으로 옮겨 간 새싹들이 잘 자라고 있나 늘 신경이 쓰인다.
사람 새끼처럼.
가다가 들러보고 오다가 쳐다보고.
잘 자라고 있어,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
별거 아닌 게 나의 자부심을 한껏 올려놓는다.
잘 성장한 자식이 부모에겐 훈장이 듯, 나의 새싹들도 그러하더라.
별거 아닌 게 나에게 희망이 된다.
영롱한 햇살이 가득 퍼지는 아침 텃밭,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나를 홀리고 있다.
지금 오월이 차고 유월이 무르익으면 태어날 하얀색 감자꽃이 벌써 기다려진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 넘어질까 곁에서 애틋하게 있어주는 엄마이듯
하루하루 키가 커가는 고추, 토마토, 가지, 오이, 참외, 호박 곁에 지지대를 박아 놓으려 한다.
고사리 같은 손 살짝 잡아주듯
집게로 끈으로 동그라게 넉넉하게 묶어 놓으려 한다.
언제 어떻게 몰아칠지 걱정되는 거친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말이다.
텃밭은 점점 사람을 닮아간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처럼 텃밭이 닮아간다.
고집스럽다, 꼼꼼하다, 귀찮다, 치밀하다, 건성건성이다, 네 탓이다 등등 말하지 않아도
손길의 장본인이 읽힌다.
소름이 돋는다.